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탁발규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굴돌이 제기한 정통성에 대한 부분은 탁발규의 아버지가 탁발십익건의 둘째 서장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탁발규의 즉위는 합법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모친인 하씨 부인의 도움으로 탁발규는 독고부 군대의 공격을 피해 백성을 데리고 하란부로 이주하고 후연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탁발규의 행위에 유현과 굴돌은 전연의 후예들이 세운 국가인 서연(西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후연의 황제 모용수는 북방 경영에 위협이 되는 서연과 동맹한 유현과 굴돌을 응징하기 위해 탁발규를 지원했다. 탁발규와 후연의 모용수는 서연과 유현, 굴돌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유현의 세력도 약해졌고 독고부에서는 내란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서 탁발규와 모용수는 연합해 독고부를 쳤고, 대승을 거두었다.
독고부의 위협이 없어지자 탁발규의 북위는 점점 더 강성해졌다. 북위가 성장하는 것의 배경에는 후연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점점 성장하는 북위에 두려움을 느낀 모용수는 북위를 압박하기 위하여 중산에 사신으로 온 탁발규의 동생 탁발고를 억류하고, 전쟁에 쓸 말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한 모용수의 배경에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 유목민족의 제도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모용수는 북위가 아직 성장 중이라서 유목민족적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서(魏書)』, 卷 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 登國元年正月六日,拓跋珪得到以賀蘭部為首的諸部支持在牛川大會諸部,召開部落大會,即位為代王,年號登國。拓跋珪任用賢能,勵精圖治,重興代國。即位不久,便移都代國原都盛樂,並推動農業,讓人民休養生息。同年四月,改稱魏王,稱國號為魏,史稱北魏。北魏建立時四週有強敵環伺,北有賀蘭部、南有獨孤部、東有庫莫奚部、西邊在河套一帶有匈奴鐵弗部、陰山以北為柔然部和高車部、太行山以東為慕容垂建立的後燕及以西的慕容永統治的西燕。因為叔父拓跋窟咄為了爭位與劉顯勾結,企圖取拓跋珪而代之形成內部不穩,于桓等人意圖殺害拓跋珪以響應窟咄,莫題等人亦與窟咄通訊。拓跋珪殺死于桓等五人,赦免莫題等七姓,但都因恐懼內亂而往依賀蘭部,借陰山作屏障防守,又派人向後燕求援。同年十一月,拓跋窟咄逼近,部眾惶恐不安。慕容垂之子慕容麟帶領的後燕援軍此時仍未到,於是先讓北魏使者安同先回去,讓魏人知燕軍已在附近,穩定人心。拓跋珪於是領兵會合後燕援軍,在高柳大敗拓跋窟咄。窟咄帶領殘兵敗將西逃,依附鐵弗部,被鐵弗部首領劉衞辰殺死,拓跋珪接收其部眾。十二月,後燕任命拓跋珪為西單于,封上谷王,但拓跋珪不受。
그러나 그러한 모용수의 생각과는 달리, 탁발규는 형제상속제를 폐지하고, 부자세습 제도를 도입하는 단계에 들어와 있었다. 탁발규는 이러한 협박에 모용수를 비난하면서 거절했다. 전략에 실패한 모용수는 대노하여 탁발고를 죽이고 북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구실을 찾게 되었다. 한편 탁발규는 모용수와 적대관계가 되면서 서연의 모용영(慕容永)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후 독고부의 부족들이 탁발선비에 귀속되었다. 탁발규는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를 토벌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고, 중원으로 진출을 개시했다. 한편 후연의 모용수는 북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가장 걸림돌인 서연을 공격하기로 결의하고 아들인 모용보를 보내 서연의 모용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용영은 모용수의 계략에 빠져 연달아 패배해 결국 서연은 멸망하였다. 서연을 멸망시킨 후연의 모용수는 북위와 맞서기 위해 국경 지대에 각 요새들을 건설하고 곳곳에 방어진을 만들었다.
395년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모용보는 전쟁에 소질이 없는 위인이었다. 탁발규는 강변에 많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병사들에게 방비를 당부하면서, 대군을 파견해 모용보와 중산의 연락을 두절시켰다. 탁발규는 서신을 위조해 70세의 모용수가 죽었다고 보냈다. 모용보는 이를 믿었고, 황제의 지위가 넘어갈 것을 염려한 모용보는 서둘러 회군했다. 탁발규는 이를 놓치지 않고 정예군 2만을 지휘해 신속하게 강을 건넜다. 모용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하자, 오늘날 산서성 대동(大同)부근의 참합파(參合陂)까지 추격했다. 그리고 급한 철군으로 인해 후연의 군사가 지쳐서 쉬고 있었던 틈을 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참합피(參合陂) 전투에서 수만 명이 죽었고, 수만 명이 투항했으며 태자 모용보는 몇 천의 군대와 함께 달아났다. 탁발규는 동생 탁발고의 복수를 대신으로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한 후연군들을 모두 참살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잔인성을 보여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후연군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감히 반항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의 의미로도 가지고 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燕魏相持積旬,趙王麟將慕輿嵩等以垂為實死,謀作亂,奉麟為主;事泄,嵩等皆死,寶、麟等內自疑。冬,十月,辛未,燒船夜遁。)
모용보의 패전소식을 들은 모용수는 396년 다시 출정하여 북위를 공격했다. 후연군들은 몰래 행군하여 순식간에 평성에 도착했다. 탁발규는 이 때 순시 중이었으므로 후연군들은 방비가 허술한 평성을 쉽게 접수했다. 이에 모용수는 평성에 입성하려고 행군하던 중에 참합파를 지나게 되었다. 모용수는 참합파에서 후연군 전사자들의 참혹한 시체들을 목격하고 나서 중병에 걸렸다. 이 때 기록을 두고『위서(魏書)』에서는 “병사들이 죽어 시체가 산을 이룬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순간, 병사들은 울부짖고 대성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평성에 까지 들렸으며, 연왕 모용수가 이를 두고 근심하였다.” 라고 하였다. (『위서(魏書)』, 卷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兵事, 山通過殺屍體, 光景慘酷, 目擊一個時刻,兵事做的, 轟鳴聲大聲痛哭, 天地振動,聲音也沒, 有在平城,燕王慕容垂, 把它謹審“。)
모용수가 중병에 걸리자 후연군들은 본국으로 퇴각하였고 모용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모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탁발규는 40만 대군을 휘몰아 후연을 공격했다. 북위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상곡(上谷), 병주(昞州), 상산(上散)등을 함락하고, 황하 이북의 후연 영토 가운데 중산(中山), 업(鄴), 신(伸) 이 세 도성만 남겨둔 채로 모두 북위의 영토가 되었다. 탁발규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도성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북위의 군사들의 피해만 늘어났다. 그것은 탁발규가 항복한 포로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를 알기 때문에 후연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 성을 사수했다. 이에 탁발규는 포로를 죽인 것에 대해 크게 후회했다. 탁발규는 포로를 모조리 죽이자 한 장수를 파면하고 투항한 사람들을 우대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397년 정월, 탁발규는 신성을 공략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에 저항지 중 하나인 신성을 점령한 북위의 탁발규는 후연이 중산과 업성 밖에 없음을 알고 완전히 무력해졌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군력의 희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탁발규는 북위로 회군하면서 군사를 주둔지에 배치해 후연을 감시하는 체계로 갔다.
『위서(魏書)』, 卷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 登国十年, 北魏侵逼後燕附塞諸部,慕容垂就於同年五月派其太子慕容寶伐魏。拓跋珪知大軍前來,率眾到河西避戰。燕軍於七月到五原後收降魏別部三萬多家人,又收穄田穀物及造船打算渡河進攻。拓跋珪亦進軍河邊,與燕軍對峙。北魏一方面派許謙向後秦請求援兵,一面卻派兵堵截燕軍與後燕都城中山的道路,並抓住取道去前線的燕國使者。因著慕容垂在出兵時已經患病,而堵截道路令慕容寶久久都不知道國內消息,拓跋珪於是逼令抓到的使者向燕軍謊稱慕容垂的死訊,成功動搖燕軍將士的軍心。燕魏兩軍自九月起隔河對峙至十月,燕軍終因內亂而被逼燒船撤退。其時黃河河水未結,魏軍未能及時渡河追擊。但次月大風令河面結冰後,拓跋珪即下令渡河並派二萬多精騎追擊燕軍。魏军在参合陂打败燕军,俘獲大量燕軍將士及官員,拓跋珪除了選用有才的如賈閏、賈彜等人留下外,將其他官員都送回後燕,但同時將燕兵都坑殺。史称參合陂之戰。登国十一年三月,慕容垂率軍再度伐魏,攻陷平城,留守平城的拓跋虔戰死,守城的三萬餘家部落皆被俘。接著慕容垂更派慕容寶等進逼拓跋珪。拓跋珪此時十分驚懼,打算離開盛樂避兵,而諸部因驍勇善戰的拓跋虔戰死,亦有異心,令拓跋珪不知所措。可是慕容垂因見參合陂堆積如山的燕兵屍體而發病,被逼退兵,並病逝于上谷。同年七月,拓跋珪建天子旌旗,並改元皇始,並正式圖取後燕所佔的中原土地。
산서성 대동에 있는 북위 시조 도무제 탁발규의 동상
성락도성 복원 모형 - 산서성 대동박물관
내몽골 후허하오터 서남부에 있는 운중성 유지, 이 성은 북위 시기 하란부 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