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씨족과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도무제가 황제가 된 다음부터 남북조의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 한국학계에서는 지배선과 박한제가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할 때 북위의 건국을 남북조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하였으므로 본고에서는 지배선과 박한제가 구분한 시대적 구분론을 따르기로 하였다.
북위를 세운 탁발규는 대나라 왕 탁발십익건의 손자이자 탁발식의 아들이다. 그는 대나라 하란부(下蘭部)에서 출생했으며 어머니 역시 하(下)씨이다. 371년 탁발규가 태어나기 몇 달 전 대나라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탁발식이 이를 토벌하러 종군하던 중 전사했다. 그러던 중 몇 달 후에 하씨 부인은 탁발규를 낳았고 탁발십익건이 전진과의 대치상태에서 부족이 분열될 것을 극히 우려했다. 특히 하란부 세력과의 관계가 약화 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임신 중인 며느리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 후 십익건과 하씨 부인은 아들 셋을 더 낳았는데, 그들이 탁발의(拓跋儀), 탁발열(拓跋烈), 탁발고(拓跋孤)이다. 탁발규는 배다른 형제들과 같이 지낼 수 밖에 없었고 형제에 대한 우애와 탁월한 리더쉽으로 하란부 전체를 탁발씨에서 가장 강력한 부로 만들었다. 376년 10월, 전진의 부대가 대나라를 공격하여 탁발십익건과 하씨부인, 탁발규 등의 왕족은 도성인 성락에서 양산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십익건의 아들 탁발식군(拓跋寔君)이 반란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였다. 그래서 하씨부인은 십익건을 사로잡고, 탁발규가 할아버지를 포박하여 항복을 한다는 조건으로 전진의 군대에 투항했다. (『위서(魏書)』, 卷 八十三,「燕鳳傳」, 第十 [본문] 鳳以太祖幼弱,固請於苻堅曰:“代主初崩,臣子亡叛,遺孫沖幼,莫相輔立。其別部大人劉庫仁勇而有智,鐵弗衞辰狡猾多變,皆不可獨任。宜分諸部為二,令此兩人統之。兩人素有深讎,其勢莫敢先發。此禦邊之良策。待其孫長,乃存而立之,是陛下施大惠於亡國也.” 堅從之。)
전진의 군대는 대나라를 평정하고, 십익건의 귀족들을 장안으로 보냈다. 당시 전진의 황제 부견(苻堅)은 도량이 크고 관대하여 적국의 귀족을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그러한 관용이 악조건으로 반전되어 부견은 후일 모용부(慕容部)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관용적 성격의 부견은 십익건의 귀족들을 장안의 태학에 보내 교육을 시키며 인재로 성장시켰고 기타 대나라에 협력했던 귀족들도 이와 같은 대우를 하였다. (『위서(魏書)』, 卷 二十八,「劉庫仁傳」, 第 十一. [본문] 建國二十九年,昭成暴崩,太祖未立,苻堅以庫仁為陵江將軍、關內侯,令與衞辰分國部眾而統之。自河以西屬衞辰,自河以東屬庫仁。於是獻明皇后攜太祖及衞秦二王自賀蘭部來居焉。庫仁盡忠奉事,不以興廢易節,撫納離散,恩信甚彰。)
그러나 탁발식군과 탁발규는 친족을 배신한 죄로 부견에 의해 처분이 내려졌는데 탁발식군은 형제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 죄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탁발규와 하씨 부인에게는 할아버지를 묶고 투항하려한 죄를 물어 촉(蜀)으로 유배를 보냈다. 탁발규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탁발선비의 씨족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으며 재기를 노렸다.
378년 4월, 부견은 부비(符丕)에게 17만을 주고 동진의 양양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379년 2월, 양양자사 주서가 항복해왔다. 동진을 공격할 모든 조건이 갖춰진 부견은 직접적으로 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하기 직전 선발대로 부융을 보내어 동진의 광릉을 압박했으나 패배했다. 여기에 부견은 노하여 대대적인 병력으로 동진을 치자고 했으나, 모든 관료들이 반대했고, 그가 믿는 동생 부융도 반대했으나, 모용부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만이 찬성했다. 부견은 이에 힘을 입어 그의 뜻대로 남정을 감행했다.
부견의 100만 대군은 383년 비수대전에서 사안(謝安)과 사석(謝石)이 이끄는 군대에게 대패하고 거의 전멸을 면치 못했다.하씨부인과 탁발규 모자는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정국에 전진에 귀속하고 있는 탁발부 세력들에 전언을 넣는 한편 장안에 기거하는 전연의 귀족 모용수에게 청원하여 함께 이동할 수 있게 부탁했다. 모용수는 이러한 청을 받아들였고 하씨부인과 탁발규를 비롯한 탁발선비 세력들은 북방의 중산을 경유하여 옛 대나라 영토에 돌아가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자와 일행은 독고부(獨考部)에 도착했지만, 얼마 후 독고부에서 내란이 일어나 유현(劉鉉)이 독고부의 왕이 되었다.
유현은 독고부의 맹주가 되려 하였고 대나라의 옛 영토까지 넘보게 되자 탁발규에게는 유현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현은 탁발규와 탁발선비의 씨족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당시 탁발규의 고모는 유현의 제수였다. 탁발규의 고모는 이러한 사실을 즉각 하씨 부인에게 알렸고 하씨 부인은 탁발규와 탁발씨족들을 탈출시켜 하란부로 보냈다. 그러자 유현은 하씨 부인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현의 동생 집안 식구들이 이에 강력히 반대하자 하씨 부인을 죽이려던 생각에서 철회했다. 그리고 이후, 하씨 부인은 하란부로 도주하여 탁발선비 씨족들에 합류하게 되었다. *
*『위서(魏書)』, 卷 八十三,「鐵弗劉虎傳」, 第 三 [본문] 登國中,衞辰遣子直力鞮寇南部,其眾八九萬,太祖軍五六千人,為其所圍。太祖乃以車為方營,並戰並前,大破之於鐵岐山南,直力鞮單騎而走,獲牛羊二十餘萬。乘勝追之,自五原金津南渡,逕入其國,居民駭亂,部落奔潰,遂至衞辰所居悅跋城。衞辰父子驚遁,乃分遣諸將輕騎追之。陳留公元虔南至白鹽池,虜衞辰家屬;將軍伊謂至木根山,擒直力鞮,盡并其眾。衞辰單騎遁走,為其部下所殺,傳首行宮,獲馬牛羊四百餘萬頭。先是,河水赤如血,衞辰惡之,及衞辰之亡,誅其族類,並投之於河。然而.
*『진서(晉書)』, 卷 百三十, 「載記」, 第 三十, <赫連勃勃傳> [본문] 寫:後魏師伐之,令其子力俟提拒戰,為魏所敗。魏人乘勝濟河,克代來,執辰殺之。與魏書所載有所不同。
탁발규가 하란부에 도착하자 흩어져 있던 대나라 귀족들과 부족민들이 잇달아 귀속해오니 386년 정월에 탁발선비와 하란부를 중심으로 한 선비정권이 수립되고 탁발규는 대(代)나라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여기까지 탁발규가 대나라 왕이 되기까지 시대적 배경과 탁발규라는 인물의 일생이다.
여기에서 탁발규의 성정을 분석해보면 탁발규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묶고 전진에 투항하려 하였다. 이것은 친족을 배신하려 한 북방기마유목민족이 그간의 역사에서 증명했고 의리와 신뢰를 중시했던 행위와는 분명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탁발규는 분명 부족의 수장으로써 자격미달이었다. 그러나 5호 16국이라는 혼란기에는 수장으로써의 도덕적 자격을 판단하기 보다는 혈통적으로 가깝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것은 혼란기로부터 부족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통치자의 지도하에 안정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정화에 대한 갈망은 탁발선비에도 예외 없이 행해졌다.
탁발선비의 기마병 벽화
탁발선비 발상지 후룬베이얼 평원
탁발십익건의 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