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학, 인류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부분의 고증에 있어 추후 연구과제로 생각하여 탁발씨 초기 왕조인 대나라와의 비교 고찰도 함께 진행 할 예정이다.
탁발하녹(拓跋賀傉)이 탁발울률의 뒤를 이어 대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탁발하녹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본 단락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후 325년 탁발하녹이 죽자 동생인 탁발흘나(拓跋紇那)가 즉위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나라는 2중 군주의 각축전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탁발흘나가 매우 용맹하여 석륵의 후조 국경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탁발흘나의 용맹성에 석륵은 전투마다 패배하여 위기를 겪었다. 그러자 석륵은 탁발흘나를 붕괴시키기 위하여 후조에 망명해 있던 탁발예궤(拓跋翳槐)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탁발예궤는 석륵의 예상대로 탁발흘나가 석륵을 공격하러 수도인 성락을 비운 사이에 군사를 일으켜 성락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탁발흘나는 즉각 회군하여 성락을 탈환하기 위해 탁발예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탁발흘나는 옛 오손국 지역으로 도주하여 오손국의 영토를 병합하고 오손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329년 탁발예궤가 대나라 왕에 즉위하게 되었다. 후조의 도움을 받은 탁발예궤는 후조에 복종하여 종속국이 되었고 매년 조공하기 위해 부족민들을 착취하니 사방에서 변란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335년에 탁발흘나가 부족민들의 변란을 틈타 대나라를 공격하여 탁발예궤를 몰아내고 도성인 성락을 함락했다. 탁발예궤는 후조로 도주하였으나 후조의 2대 황제 석계룡의 도움으로 자객을 보내 탁발흘나를 암살했다. 그리고 337년 성락으로 입성하여 다시 대나라의 왕이 되었다. 탁발예궤의 통치는 1년을 채 못가서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정국에서 대나라는 점점 쇠퇴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탁발흘나와 탁발예궤의 통치권 분쟁은 부족계열의 이탈을 야기 시켰다. 게다가 후조의 내정간섭까지 들어와 대나라는 단독 국가로써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탁발선비는 대나라 왕에서 후(后)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탁발선비는 또 다시 분열하였고 대나라의 영토도 갈수록 줄어들어 국가로써의 구실이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때 탁발울률의 차남인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탁발예궤의 유언으로 대나라 왕이 되어 이러한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일찍이 탁발십익건은 탁발예궤가 후조에 있을 적에 같이 후조로 망명하였고 탁발예궤가 성락으로 입성하여 대나라 왕이 되자 후조의 석계룡에게 볼모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탁발예궤가 죽자 귀국하여 대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340년 흉노의 유호(劉湖)가 대나라 국경 인근을 공격하려 하자 탁발십익건은 유호의 국경지대 공격을 잇달아 막아냈다. 그리고 같은 해 유호가 죽자 아들 유무환(劉務桓)이 화의를 신청하여 화의를 하였다. 이후 대나라의 내치를 다지면서 탁발흘나와 탁발예궤 시기에 손상되었던 국력을 거의 회복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360년에 정령과 고차(高車)가 침입해오자 이를 격퇴했고 363년에는 고차가 영유하고 있는 바이칼 호 인근을 공격하여 고차의 본거지인 벽성(璧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고차의 전 지역을 장악한 다음 다수의 포로와 가축을 얻고 돌아왔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탁발십익건은 중원지역에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여 후조 시대에 함락되었던 옛 영토를 거의 되찾았다.
당시 전진(前秦)이 매우 막강하여 화북의 거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때 탁발십익건이 전진의 국경 인근을 공격하여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진의 부견에게 376년 크게 패하면서 군 전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어 전진이 공격해오자 잇달아 패배하여 수도 성락을 위협하자 탁발십익건은 성락을 버리고 양산(陽厁) 북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대나라의 국력이 아직 중원을 정벌할 때가 아닌데 서둘러 중원을 정벌한 것이 큰 패착이고 고차의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고차는 대나라에 대해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전진에게 패하여 군 전력의 대부분이 손상되자 고차 각 부족들은 대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대나라 서쪽 지역을 장악했고 탁발십익건은 고차를 다시 토벌하러 나섰다. 그러나 고차는 탁발십익건의 군대를 유인하여 격파했고 탁발십익건은 도주하다가 서장자 탁발식군(拓跋寔君)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전진의 부견이 공격해와 성락과 양산을 차례대로 함락하고 대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탁발선비는 와해되어 전진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전진은 탁발선비의 씨족들을 여러 전투에 투입하여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이후 전진의 부속기를 거치다가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가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한 틈을 노려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그리고 다음 해 387년, 국가이름을 대나라에서 위(魏)나라로 바꾸고 황제 제위도 참칭하였다. 사가에서는 이를 조조의 위나라와 전국시대의 위나라를 구분하기 위하여 탁발선비의 위나라를 북위(北魏)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여기까지 탁발선비의 중원 등장의 배경과 진출, 그리고 북위의 건국까지 서술하였다. 무엇보다 탁발선비를 연구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부분은 대(代)나라의 실체였다. 대나라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참조하여 분석한 것으로 현재 본 단락을 서술하였지만 자세한 대나라의 역사적 서술은 문헌사료의 부재로 인한 한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대나라에 관한 중국 문헌 사료와 몽골『흉노사(Хун похожи)』에 도출되어지는 문헌 기록은 대나라의 실체에 대해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탁발선비의 초기사인 대나라의 실체에 대한 발견이 본 단락에서 발견한 최고의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초기 선비사 연구의 발전 방향과 관련하여 문헌 사료 부재로 점철되었던 부분에서 새로운 이론과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것에서 의의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