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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445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학, 인류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부분의 고증에 있어 추후 연구과제로 생각하여 탁발씨 초기 왕조인 대나라와의 비교 고찰도 함께 진행 할 예정이다.


탁발하녹(拓跋賀傉)이 탁발울률의 뒤를 이어 대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탁발하녹의 치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본 단락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후 325년 탁발하녹이 죽자 동생인 탁발흘나(拓跋紇那)가 즉위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대나라는 2중 군주의 각축전으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탁발흘나가 매우 용맹하여 석륵의 후조 국경을 유린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탁발흘나의 용맹성에 석륵은 전투마다 패배하여 위기를 겪었다. 그러자 석륵은 탁발흘나를 붕괴시키기 위하여 후조에 망명해 있던 탁발예궤(拓跋翳槐)를 귀국시켰다. 그리고 탁발예궤는 석륵의 예상대로 탁발흘나가 석륵을 공격하러 수도인 성락을 비운 사이에 군사를 일으켜 성락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탁발흘나는 즉각 회군하여 성락을 탈환하기 위해 탁발예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탁발흘나는 옛 오손국 지역으로 도주하여 오손국의 영토를 병합하고 오손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329년 탁발예궤가 대나라 왕에 즉위하게 되었다. 후조의 도움을 받은 탁발예궤는 후조에 복종하여 종속국이 되었고 매년 조공하기 위해 부족민들을 착취하니 사방에서 변란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335년에 탁발흘나가 부족민들의 변란을 틈타 대나라를 공격하여 탁발예궤를 몰아내고 도성인 성락을 함락했다. 탁발예궤는 후조로 도주하였으나 후조의 2대 황제 석계룡의 도움으로 자객을 보내 탁발흘나를 암살했다. 그리고 337년 성락으로 입성하여 다시 대나라의 왕이 되었다. 탁발예궤의 통치는 1년을 채 못가서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정국에서 대나라는 점점 쇠퇴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탁발흘나와 탁발예궤의 통치권 분쟁은 부족계열의 이탈을 야기 시켰다. 게다가 후조의 내정간섭까지 들어와 대나라는 단독 국가로써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탁발선비는 대나라 왕에서 후(后)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탁발선비는 또 다시 분열하였고 대나라의 영토도 갈수록 줄어들어 국가로써의 구실이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때 탁발울률의 차남인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탁발예궤의 유언으로 대나라 왕이 되어 이러한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다. 일찍이 탁발십익건은 탁발예궤가 후조에 있을 적에 같이 후조로 망명하였고 탁발예궤가 성락으로 입성하여 대나라 왕이 되자 후조의 석계룡에게 볼모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탁발예궤가 죽자 귀국하여 대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340년 흉노의 유호(劉湖)가 대나라 국경 인근을 공격하려 하자 탁발십익건은 유호의 국경지대 공격을 잇달아 막아냈다. 그리고 같은 해 유호가 죽자 아들 유무환(劉務桓)이 화의를 신청하여 화의를 하였다. 이후 대나라의 내치를 다지면서 탁발흘나와 탁발예궤 시기에 손상되었던 국력을 거의 회복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360년에 정령과 고차(高車)가 침입해오자 이를 격퇴했고 363년에는 고차가 영유하고 있는 바이칼 호 인근을 공격하여 고차의 본거지인 벽성(璧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고차의 전 지역을 장악한 다음 다수의 포로와 가축을 얻고 돌아왔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탁발십익건은 중원지역에 진출하기 위해 남하하여 후조 시대에 함락되었던 옛 영토를 거의 되찾았다.


당시 전진(前秦)이 매우 막강하여 화북의 거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때 탁발십익건이 전진의 국경 인근을 공격하여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진의 부견에게 376년 크게 패하면서 군 전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어 전진이 공격해오자 잇달아 패배하여 수도 성락을 위협하자 탁발십익건은 성락을 버리고 양산(陽厁) 북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다. 대나라의 국력이 아직 중원을 정벌할 때가 아닌데 서둘러 중원을 정벌한 것이 큰 패착이고 고차의 부족들을 모두 복속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고차는 대나라에 대해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전진에게 패하여 군 전력의 대부분이 손상되자 고차 각 부족들은 대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대나라 서쪽 지역을 장악했고 탁발십익건은 고차를 다시 토벌하러 나섰다. 그러나 고차는 탁발십익건의 군대를 유인하여 격파했고 탁발십익건은 도주하다가 서장자 탁발식군(拓跋寔君)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던 상황에서 전진의 부견이 공격해와 성락과 양산을 차례대로 함락하고 대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탁발선비는 와해되어 전진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전진은 탁발선비의 씨족들을 여러 전투에 투입하여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이후 전진의 부속기를 거치다가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가 비수대전에서 전진이 패배한 틈을 노려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그리고 다음 해 387년, 국가이름을 대나라에서 위(魏)나라로 바꾸고 황제 제위도 참칭하였다. 사가에서는 이를 조조의 위나라와 전국시대의 위나라를 구분하기 위하여 탁발선비의 위나라를 북위(北魏)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여기까지 탁발선비의 중원 등장의 배경과 진출, 그리고 북위의 건국까지 서술하였다. 무엇보다 탁발선비를 연구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부분은 대(代)나라의 실체였다. 대나라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참조하여 분석한 것으로 현재 본 단락을 서술하였지만 자세한 대나라의 역사적 서술은 문헌사료의 부재로 인한 한계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대나라에 관한 중국 문헌 사료와 몽골『흉노사(Хун похожи)』에 도출되어지는 문헌 기록은 대나라의 실체에 대해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탁발선비의 초기사인 대나라의 실체에 대한 발견이 본 단락에서 발견한 최고의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초기 선비사 연구의 발전 방향과 관련하여 문헌 사료 부재로 점철되었던 부분에서 새로운 이론과 근거를 제시하였다는 것에서 의의를 두고 있다.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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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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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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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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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10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6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9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2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6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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