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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364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청하였다. 풍홍으로 부터 망명 요청을 받은 고구려 장수태왕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2만의 군사를 내주어 북연의 밀사 양이와 함께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자신을 맞이하려 하자 풍홍은 도성인 용성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동쪽의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풍홍도 고구려에 망명했다. 그렇게 북연은 북위와 고구려에게 멸망한 상황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圖後擧,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 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 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 王遣將葛盧孟光, 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 迎燕王, 葛盧孟光入城, 命軍脫弊褐, 取燕武庫精仗, 以給之, 大掠城中, 五月, 燕王率龍城見戶東徙, 焚宮殿, 火一旬不滅, 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盧孟光帥騎殿後, 方軌而進, 前後八十餘里, 魏主聞之, 遣散騎常侍封撥來, 令送燕王, 王遣使入魏奉表 稱當與馮弘, 俱奉王化, 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騎卒, 劉絜樂平王丕等諫之, 乃止.)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자 438년 음력 3월, 장수태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으로 이동하게 했다가 다시 북풍(北豐)에 이주시켰다. 또한 풍홍의 시종과,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망명요청을 하였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의 인도를 요구했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字文通,文成帝之季弟,惠懿帝自立,拜中領軍,封汲郡公。太平元年文成帝立,拜尚書右僕射,進封中山公,遷尚書令、司徒、錄尚書事。太平二十二年文成帝病重,弘弒帝自立,即天王位,正月壬午朔,大赦,改年太興。二月,立夫人慕容氏為皇后。二年正月,立少子王仁為太子。六月有鼠集城西,盈數里地中,西行至水,前者銜馬尾,後者迭相銜尾而渡,識者以為民遷之象。七月,魏師來伐神高。八月,石城、遼東、營丘、城週四郡並降魏。九月,魏師還。徙民四萬餘戶而西。三年六月,魏永昌王來伐。五年四月,遣右衛孫德乞師於宋。十二月,又遣尚書陽伊請迎於句麗。六年三月,端門崩。四月,魏又遣侍中建興公虞弼、東平公鵝青來攻,克白狼。句麗將葛居、孟光率眾數萬隨陽伊來迎,屯於臨川。尚書令郭生因民之憚遷,開門而引魏軍。魏軍疑而不赴,生遂勒眾攻帝,帝引句麗兵入自東門,與生戰於闕下,生中流矢卒。句麗軍既入城,取武庫甲以給其眾,城內美女皆句麗軍人所掠。五月乙卯,帝率龍城見戶東徙,焚燒宮殿,火一旬不絕。令婦人被甲居中,陽伊等勒精兵於外,而居光率騎後殿,方軌而進,前後八十餘里,魏兵追至遼水,不擊而還,遣使征弘於句麗,北燕亡。後二年,句麗察弘有歸宋之意,遂殺之。)


이에 장수태왕은 풍홍이 송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장수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손수와 고구(高仇)는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명을 참살했다. 이에 일부 풍씨 일족이 살아남아서 북위에 귀순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인물이 풍소불(馮素弗)이다. 이후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홍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고 사신 편에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고 훗날 북위의 풍태후가 풍홍의 손녀이다. 고고학적인 발굴로는 요녕성(遼寧省) 북요시(北遼市) 서관영자(西關永資)서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의 분묘(墳墓)가 발굴되었으나 명문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현재 밝혀진 북연의 유일한 유적인데 해당 지역 뿐 아니라 요서 지역이라 일컫는 하북성 북부 지역에서는 더 이상 북연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駒等迎之, 幷令我資送, 王不欲使弘南來, 遣將孫漱高仇等, 殺弘于北豊, 幷其子孫十餘人,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掩討漱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 不欲違其意, 下白駒等獄, 已而原之.)


북위에 귀순한 모용선비 씨족은 북위가 멸망하자 수, 당에 귀속되었다. 이후 당나라에서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하자 모용씨들은 대거 도륙을 당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서진하여 돌궐에 귀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토욕혼에 원래 존재했던 모용토욕혼(慕容吐谷渾)의 남은 씨족들과 합류하여 서몽골에 정착하였다. 이들을 몽골사에서 나이만(Naiman) 부족이라 하였으며 칭기즈칸에 의해 통합되어 몽골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본 단락에서는 모용선비의 국가인 전연, 후연, 북연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남은 모용선비의 국가인 남연(南燕), 토욕혼 모용선비에 대한 역사는 다음 장인 부록 편에 서술할 예정이다.


모용선비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고구려와 많은 연관성을 가진 선비의 씨족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주로 대립했고 북연이 고구려에 멸망함에 따라 모용선비와의 대립은 끝이 났지만 두 나라의 대립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판도가 결정되기도 하였던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용선비는 앞으로 서술될 탁발선비와는 달리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문화, 고구려와 부여의 문화까지 융합하여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했다.


그러한 문화적인 영향이 5호 16국 시대의 모용외, 모용황, 모용준 등의 명군(名君)들이 탄생되었고 한 때는 화북 지대를 통일할 수 있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모용선비의 남은 부족민들은 중국에 흡수 되거나 몽골로 건너가 몽골의 칭기즈칸 원정에 참전하여 몽골의 일족이 되었다. 한족과 융합하려다가 도리어 한족에게 흡수되었던 탁발선비와는 다른 부분이었고 이들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몽골계로 재탄생됨으로써 본연의 정체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지금은 모용선비의 풍속과 문화를 볼 수 없지만 당시 모용선비는 선비계통을 대표했던 강대국이자 모용선비의 부족민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사(戰士)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의 혼은 서몽골의 샤머니즘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탕가스(Tangas)족에게 찾을 수 있다. 탕가스 족은 모용선비의 후예들로 추정되는 민족으로 서몽골에서 약 4천여 명이 살고 있다. 이들 탕가스 족은 1,700년이 지난 현재까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부족 중 하나로써 전사(戰士)집단을 형성하고 있어 선비계통 민족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탕가스 족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필요한 상황이고 근대 모용선비에 대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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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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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와 북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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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 북연을 멸망시킨 고구려의 힘.. 윤내현, 리지린 교수 등이 주장한 당시의 고구려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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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7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09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9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1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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