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청하였다. 풍홍으로 부터 망명 요청을 받은 고구려 장수태왕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에게 2만의 군사를 내주어 북연의 밀사 양이와 함께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자신을 맞이하려 하자 풍홍은 도성인 용성에 남아있던 백성들을 동쪽의 고구려 땅으로 이주시키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풍홍도 고구려에 망명했다. 그렇게 북연은 북위와 고구려에게 멸망한 상황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圖後擧,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 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 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 王遣將葛盧孟光, 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 迎燕王, 葛盧孟光入城, 命軍脫弊褐, 取燕武庫精仗, 以給之, 大掠城中, 五月, 燕王率龍城見戶東徙, 焚宮殿, 火一旬不滅, 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盧孟光帥騎殿後, 方軌而進, 前後八十餘里, 魏主聞之, 遣散騎常侍封撥來, 令送燕王, 王遣使入魏奉表 稱當與馮弘, 俱奉王化, 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隴右騎卒, 劉絜樂平王丕等諫之, 乃止.)
고구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풍홍은 요동성에 머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교만하게 굴자 438년 음력 3월, 장수태왕은 풍홍을 평곽(平郭)으로 이동하게 했다가 다시 북풍(北豐)에 이주시켰다. 또한 풍홍의 시종과, 태자 풍왕인(馮王仁)을 볼모로 잡았다. 그러자 풍홍은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망명요청을 하였다. 풍홍의 요청을 받은 송의 유유는 그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고구려에 보내 풍홍의 인도를 요구했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字文通,文成帝之季弟,惠懿帝自立,拜中領軍,封汲郡公。太平元年文成帝立,拜尚書右僕射,進封中山公,遷尚書令、司徒、錄尚書事。太平二十二年文成帝病重,弘弒帝自立,即天王位,正月壬午朔,大赦,改年太興。二月,立夫人慕容氏為皇后。二年正月,立少子王仁為太子。六月有鼠集城西,盈數里地中,西行至水,前者銜馬尾,後者迭相銜尾而渡,識者以為民遷之象。七月,魏師來伐神高。八月,石城、遼東、營丘、城週四郡並降魏。九月,魏師還。徙民四萬餘戶而西。三年六月,魏永昌王來伐。五年四月,遣右衛孫德乞師於宋。十二月,又遣尚書陽伊請迎於句麗。六年三月,端門崩。四月,魏又遣侍中建興公虞弼、東平公鵝青來攻,克白狼。句麗將葛居、孟光率眾數萬隨陽伊來迎,屯於臨川。尚書令郭生因民之憚遷,開門而引魏軍。魏軍疑而不赴,生遂勒眾攻帝,帝引句麗兵入自東門,與生戰於闕下,生中流矢卒。句麗軍既入城,取武庫甲以給其眾,城內美女皆句麗軍人所掠。五月乙卯,帝率龍城見戶東徙,焚燒宮殿,火一旬不絕。令婦人被甲居中,陽伊等勒精兵於外,而居光率騎後殿,方軌而進,前後八十餘里,魏兵追至遼水,不擊而還,遣使征弘於句麗,北燕亡。後二年,句麗察弘有歸宋之意,遂殺之。)
이에 장수태왕은 풍홍이 송으로 가는 것이 고구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고 장수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손수와 고구(高仇)는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명을 참살했다. 이에 일부 풍씨 일족이 살아남아서 북위에 귀순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인물이 풍소불(馮素弗)이다. 이후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풍홍의 군사를 쳐 왕백구를 사로잡고 사신 편에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고 훗날 북위의 풍태후가 풍홍의 손녀이다. 고고학적인 발굴로는 요녕성(遼寧省) 북요시(北遼市) 서관영자(西關永資)서 북연의 재상 풍소불(馮素弗)의 분묘(墳墓)가 발굴되었으나 명문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현재 밝혀진 북연의 유일한 유적인데 해당 지역 뿐 아니라 요서 지역이라 일컫는 하북성 북부 지역에서는 더 이상 북연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豊,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駒等迎之, 幷令我資送, 王不欲使弘南來, 遣將孫漱高仇等, 殺弘于北豊, 幷其子孫十餘人,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掩討漱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 不欲違其意, 下白駒等獄, 已而原之.)
북위에 귀순한 모용선비 씨족은 북위가 멸망하자 수, 당에 귀속되었다. 이후 당나라에서 안사(安史)의 난이 발생하자 모용씨들은 대거 도륙을 당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서진하여 돌궐에 귀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토욕혼에 원래 존재했던 모용토욕혼(慕容吐谷渾)의 남은 씨족들과 합류하여 서몽골에 정착하였다. 이들을 몽골사에서 나이만(Naiman) 부족이라 하였으며 칭기즈칸에 의해 통합되어 몽골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본 단락에서는 모용선비의 국가인 전연, 후연, 북연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남은 모용선비의 국가인 남연(南燕), 토욕혼 모용선비에 대한 역사는 다음 장인 부록 편에 서술할 예정이다.
모용선비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고구려와 많은 연관성을 가진 선비의 씨족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주로 대립했고 북연이 고구려에 멸망함에 따라 모용선비와의 대립은 끝이 났지만 두 나라의 대립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판도가 결정되기도 하였던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용선비는 앞으로 서술될 탁발선비와는 달리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문화, 고구려와 부여의 문화까지 융합하여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했다.
그러한 문화적인 영향이 5호 16국 시대의 모용외, 모용황, 모용준 등의 명군(名君)들이 탄생되었고 한 때는 화북 지대를 통일할 수 있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모용선비의 남은 부족민들은 중국에 흡수 되거나 몽골로 건너가 몽골의 칭기즈칸 원정에 참전하여 몽골의 일족이 되었다. 한족과 융합하려다가 도리어 한족에게 흡수되었던 탁발선비와는 다른 부분이었고 이들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몽골계로 재탄생됨으로써 본연의 정체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
지금은 모용선비의 풍속과 문화를 볼 수 없지만 당시 모용선비는 선비계통을 대표했던 강대국이자 모용선비의 부족민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사(戰士)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의 혼은 서몽골의 샤머니즘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탕가스(Tangas)족에게 찾을 수 있다. 탕가스 족은 모용선비의 후예들로 추정되는 민족으로 서몽골에서 약 4천여 명이 살고 있다. 이들 탕가스 족은 1,700년이 지난 현재까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부족 중 하나로써 전사(戰士)집단을 형성하고 있어 선비계통 민족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탕가스 족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필요한 상황이고 근대 모용선비에 대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장수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북위와 북연 사이..
후연, 북연을 멸망시킨 고구려의 힘.. 윤내현, 리지린 교수 등이 주장한 당시의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