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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5     조회 : 421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보가 등극한 후 시어랑(侍御郞) 벼슬을 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물러났다. 397년, 모용보의 서자 모용회(慕容會)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공격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 반란군을 진압했다. 모용운은 이 공으로 인해 모용보의 양자가 되고 석양공(夕陽公)이 되는 한편 모용씨를 하사받았는데, 이후 모용운(慕容雲)이라는 이름을 썼다. 모용운은 생각이 깊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북연의 두 번째 황제가 되는 풍발(馮跋)과 두터운 친교를 쌓게 된다. 이후 모용운은 모용보의 사망 이후 인근에 숨어 살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후연 4대 황제 소문제(昭文帝) 모용희(慕容熙)는 광폭한 성격인 폭군으로 407년 황후인 부씨(苻氏)가 죽자 신하들에게 큰 소리로 곡하게 한 다음 크게 울지 않는 자들을 처벌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러자 풍발은 모용운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는데 모용운은 이를 원하지 않았으나 풍발이 뜻을 굽히지 않아 간접적으로 이에 동의했다. 모용희가 황후의 장례식 때 상여를 몸소 메고 성 밖으로 나간 것을 틈타 성문을 닫고 모용희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백성들의 동조를 얻었다. 백성들은 모용희가 수도인 용성(龍城)에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모용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성을 공격했으나 도리어 패배하고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太平御覽』, 慕容熙, 暴政犯下的, 豪華民心, 丟失。此外,402年,404年, 高句麗接受的, 侵入一東遼河,遼河西的, 一部分,一個萬里長城, 留州地方丟失了,並且威, 脅到首都。慕容熙, 嘗試反擊,但是這是, 不可能的,但操作,以及所有的, 犧牲是失敗。 407年, 高句麗五萬大軍的, 六佔領個咱, 們的, 城後燕滅亡, 直前加沙, 政變後慕容熙, 被打死的, 慕容歸, 慕容歸王位,但在不到半, 一個廣天景, 觀開土太上載者敗, 在戰爭戰死,慕容寶量, 子高雲成為, 一個擁立後燕, 北燕的, 滅亡和兩個, 分別為成立。)


『진서(晉書)』, 卷 百二十四,「載記」, 第二十四, <慕容熙傳> [본문] "볏짚 하나 묶어, 두 머리를 태우네. 대머리의 어린 아들이 와서 연을 멸하리"라는 참요가 떠돌았는데, 볏짚(藳)에서 위의 초두머리(艹)와 아래의 벼화(禾)변을 지우면 고(高)자가 되며, 운의 아버지 拔의 어릴 적 이름이 바로 대머리라는 뜻의 禿頭였다고 한다. ; “稻草綁一個,兩個光頭, 全燒滅年幼的, 兒子來到燕, 哈日的” 讖謠工作,藳艹上面和, 下面是自我, 高禾結算,雲童年倡議的, 父親流浪這只, 是意味著禿, 頭說已經禿的. 名稱。


당시 후연은 고구려(高句麗)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운이 즉위하자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푸니 고운도 북연의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이에 답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모용운이 고구려 왕족 혈통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용운의 아버지가 고발(高拔)이고 전연의 시기 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왔기 때문이다. 이 때 고발은 고구려 황족으로써 일정한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의 북방으로 이주할 때 고구려의 황족들은 그대로 후연을 섬기며 남아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이 두 나라의 연대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이득이 되는 상황을 만들려 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廣開土太王> [본문]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같은 해에 부인을 황후로,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고 국가의 기틀을 잡아 나갈 무렵 409년 겨울, 모용운은 총신(寵臣)인 이반(離班)과 도인(桃仁)에게 살해되었다. 이에『위서(魏書)』의 기록에서는 풍발이 고운을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진서(晉書)』에서는 총신에게 살해되었고 풍발이 이들 암살자들을 처단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모용운의 죽음에는 상당히 의문적인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서(魏書)』, 卷 二,「太祖 道武帝傳」, 第二. [본문] 暗殺, 馮跋到高雲, 高雲卽位, 跟著一兩個, 惠懿皇帝, 馮跋提出了諡號.


『자치통감(資治通鑑)』字子雨,十六国后燕国主,原姓高,是慕容寶的養子,「慕容」係其賜姓。他的祖父高和,屬於高句驪分支的一個族群早期的高雲於後燕時沉默寡言,並沒有什麼名氣,只有中衛將軍馮跋看出他的氣度與他結交。後燕永康二年,高雲因率軍擊敗慕容寶之子慕容會的叛軍,被慕容寶收養,賜姓慕容氏,封夕陽公。後燕建初元年馮跋反,殺皇帝慕容熙,在馮跋支持之下,慕容雲即天王位,改元曰正始,國號大燕,恢復原本的高姓。高雲自知無功而登大位,因此培養一批禁衛保護自己,但後來反被禁衛離班、桃仁所殺,高雲死後被諡惠懿皇帝。由於對高雲是否屬後燕慕容氏一族成員的看法不同,因此有人認為高雲是後燕末任君主,也有人把他視為北燕立國君主。


『진서(晉書)』, 卷 百二十四,「載記」, 第二十四, <慕容雲傳> [본문] 寶以浮譽獲升,峻文禦俗,蕭牆內憤,勍敵外陵,雖毒不被物而惡足自剿。盛則孝友冥符,文武不墜,韜光而夷仇賊,罪己而遜高危,翩翩然濁世之佳虜矣。熙乃地非奧主,舉因淫德。驪戎之態,取悅于匡床;玄妻之姿,見奇於鬒發。蕩輕舟于曲光之海,望朝涉于景雲之山,飾土木於驕心,窮怨嗟於蕞壤,宗祀夷滅,為馮氏之驅除焉。贊曰:戎狄憑陵,山川沸騰。天未悔禍,人非與能。疾走而捷,先鳴則興。道明烈烈,鞭笞豪傑。掃燕夷魏,釗屠永滅。大盜潛移,鴻名遂竊。寶心生亂,盛清家難。熙極驕淫,人懷憤惋。孽貽身咎,災無以逭。


풍발은 고운이 암살되고 일어난 혼란을 평정하고 스스로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풍발은 정치에 힘써 국내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화친하고 화북의 강자로 등장한 북위(北魏)와 대립하였다. 북연과 북위의 대립구도는 풍발이 살아있을 때만해도 대등한 구도를 이어나갔으나 점차적으로 물자가 풍부하고 어디서든 병력 동원이 가능한 북위가 우세한 형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런 도중에 풍발은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겨 북위의 위협에 대비했으며 요서 지역을 영위하며 정치적인 안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화 현상은 풍발이 430년에 죽음으로써 끝나게 되었고 북위와 대립 양상도 북위가 유리한 국면으로 우세를 가지며 북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진서(晉書)』, 卷 百二十五,「載記」, 第二十五, <馮跋傳> [본문] 姓馮氏,諱跋,字文起,晉長樂信都人也,小字乞直伐。永嘉之亂,跋祖父和避地上黨。父安,雄武有器量,西燕末帝時為將軍。西燕滅,跋東徙和龍,家於長谷。幼而懿重少言,寬仁有大度。所居上每有雲氣若樓閣,時咸異之。後燕惠愍帝立,署中衛將軍。昭文帝即位。跋犯禁,懼禍。乃與萬泥等弒帝,立其養子雲為主。雲署跋為使持節、侍中、都督中外諸軍事、征北大將軍、開府儀同三司、錄尚書事、武邑公。雲為其幸臣離班、桃仁所殺。眾推跋為主,於是以正始三年稱天王於昌黎,而不徙舊號,即國曰燕,赦其境內,改元曰太平。帝勤於政事,獎勵農桑,輕薄徭役,士民大悅。縱有元魏逼於南境,亦得承平二十餘年。二十二年死,帝病重,詔太子翼監國。宋夫人欲為其子受居圖王位,中山公弘弒帝自立,盡誅太子翼及諸子。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圖後擧,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


풍발의 죽음과 더불어 북연에서는 황제 지위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그것은 풍발의 태자와 풍발의 동생 풍홍이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북연 내에 벌어진 내전은 북연의 국력을 약화시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결국 동생 풍홍(馮弘)이 승리하여 태자를 죽이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풍홍이 최후의 승자가 되긴 하였으나 북연의 군사력은 절반 이상으로 감소했고 이와 같은 상황은 북위의 침입이 더욱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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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후연, 북연을 제압한 고구려의 철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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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의 2대 황제 풍발,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악역으로 등장했지만 그는 실제 역사속에서 드라마와 달리 북연의 짧은 전성기를 이끌었던 능력있는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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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 마지막 회에 등장하는 북연 황제 모용운.. 모용운은 이 회차에 광개토태왕에게 무릎을 꿇었다.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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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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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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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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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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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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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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