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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4     조회 : 615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에 즉위한 모용보는 배다른 동생인 모용륭(慕容隆), 모용농(慕容農)등의 보좌를 받았으며 모용농의 개혁적인 호구조사와 그 외의 세금에 관한 개혁으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그리고 북위의 위협에 대비하여 농번기에도 군사훈련을 감행하는 등 후연 영토 내부에 살고 있던 북방민족들의 이반을 낳기도 하였다.


그리고 11세의 어린 아들 모용책(慕容策)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 분쟁의 원인을 만들었으며 그 외의 다른 아들들은 외부의 번왕으로 임명하여 변경으로 보내자 이들은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396년 8월에 북위의 침공을 받았다. 이 때 북위는 하북 지역의 대부분 성들을 점령하고 후연의 수도인 중산을 위협했다. 그러자 모용보는 중산, 업(鄴), 신도(愼 都)등의 거점을 중심으로 농성을 시작하였다. 397년에 탁발규가 신도를 함락하자 모용보는 반격을 개시하여 북위군과 호타수(虖沱水)에서 맞붙었으나 대패하여 다시 중산에서 농성하였다. (『太平御覽』, 慕容寶,初在長安,與韓黃、李根等因燕樗蒱,危坐整容,誓之曰:"世云摴蒱有神,豈虛言哉?若富貴可期,頻得三盧!" 於是三擲三盧.)


3월에 대장군 모용린(慕容麟)이 모용보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하려다가 실패하여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모용보는 모용린이 유주의 군대를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산을 버리고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용린이 북위에 항복하여 북위의 장수가 되어 후연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한편 용성으로 천도하여 이동하는 도중 서장자 모용회(慕容會)의 군대를 만나 호위를 받았는데, 모용회가 모반을 일으켜 모용륭이 죽고 모용보와 모용농은 용성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후연 남쪽 변경의 모용린이 중산에 입성하여 황제로 참칭했으나 모용상(慕容詳)이 반역을 꾀하며 모용린을 죽이고 황제로 참칭했다. 그러나 북위가 다시 공격해와 중산이 북위에게 함락되고 업을 지키던 모용덕(慕容德)은 중산 함락 직후인 398년에 황하 남쪽의 활대(滑臺)로 이동하여 남연(南燕)을 건국하였다. *


* 『진서(晉書)』, 卷 六十六,「慕容垂妻段氏」, 第 六十 [본문] 元妃謂垂曰:"太子姿質雍容,柔而不斷,承平則為仁明之主,處難則非濟世之雄,陛下託之大業,妾未見克昌之美。遼西、高陽二王,陛下兒之賢者,宜擇一以樹之。趙王麟姦詐負氣,常有輕太子之心,陛下一旦不諱,必有難作。此陛下之家事,宜深圖之." )


한편 용성으로 천도하는 도중에 벌어졌던 모용회의 반란은 모용보와 모용농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용성에 안전하게 도착한 모용보는 용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모용씨의 씨족들은 이미 분열된지 오래였고 이를 통합할 만한 인물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397년 말에 북위의 군대가 약화되고 업을 지키는 모용덕(慕容德)이 남쪽으로 되돌아 올 것을 주청하는 표문이 올라오자 모용보는 대군을 동원하여 중원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용덕이 살포한 잘못된 정보였다. 이런 잘못된 정보로 모용보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모용덕이 모용보를 죽이고 정통성을 지닌 연의 황제 자리를 찬탈하기 위함이었다.


398년 모용보는 남하하여 내려오다 중산이 함락되고 북위가 남쪽으로부터 공격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군을 정비하지 못하고 이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만을 품은 군대가 모반을 일으키자 모용보는 모용농, 모용성(慕容盛)과 함께 용성으로 도망쳤다. 모용농이 배반하여 용성은 함락되고 모용보, 모용성은 성을 탈출하였다. 이러한 후연의 분열과 불안정한 정국으로 인해 화북 지역의 패권이 북위에게 자동적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탈출한 모용보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남연(南燕)의 모용덕에게 가서 의탁하려 하였으나, 모용덕이 이미 독립했음을 알고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다른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다. 이 때 반란군을 이끌던 당숙 난한(蘭汗)이 모용보를 맞이하려 하였다. 그러자 모용성은 이에 반대하여 자력으로 세력 확장을 요구했으나 모용보는 이를 듣지 않고 난한과 세력을 병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난한의 행위는 모용보를 죽이고 후연의 황제가 되어 다시 모용수 시기의 국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모용보는 난한을 믿고 다시 용성으로 돌아왔지만 난한은 모용보를 모시려는 뜻과는 달리 모용보를 살해하였다. 난한은 모용보에게 영제(靈帝)라고 시호를 올렸으며, 후에 모용성이 난한을 축출한 뒤에 묘호를 열종, 시호를 혜민제라 하였다.난한은 제위에 오르려 하였으나 모용보를 수행하던 군사들이 난한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모용보가 난한(蘭汗)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여 이탈한 모용성은 모용보가 난한에게 살해되자 모용성은 복수를 위해 난한에게 거짓 항복하였다. 난한은 창려왕(昌黎王)을 자칭하고 후연이 다스리는 지역들을 정복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난한은 모용성이 자신의 사위였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측근으로 삼았다. 모용성은 난한의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용기(慕容奇)의 반란을 사주하였다. 모용기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의 지휘권 문제로 난제(蘭堤)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난목(蘭穆)이 난제 등을 죽이고 모용기를 토벌했다. 그러나 모용성이 난목을 속이고 진중에 끌어들여 독살하고 군사를 일으켜 난한을 주살했다. 그리하여 난한의 찬탈은 종식되었다.


난한을 토벌한 모용성은 황제가 되지 않고 자신의 책봉명인 장락왕(場落王)을 자칭하며 후연의 황제를 대행하였다. 모용성은 왕권을 바로 세우고 황제가 되기 위한 기틀을 닦기 위해 필요 이상의 인물들을 제거하는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것이 역효과로 나타나 도처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모용성은 398년에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스스로 하북 지역의 서민천왕(序民天王)으로 부르며 하북의 맹주가 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황제로써의 위신을 보여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400년의 고구려 원정은 이러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모용성은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2개의 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의 영토를 개척했다.* 당시에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시기였고 이러한 모용성의 행위는 광개토태왕이 서방원정을 단행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진서(晉書)』, 卷 六十六,「慕容垂妻段氏」,第 六十 [본문] 垂死,寶嗣偽位,遣麟逼元妃曰:"后常謂主上不能嗣守大統,今竟何如?宜早自裁,以全段氏." 元妃怒曰:"汝兄弟尚逼殺母,安能保守社稷!吾豈惜死,念國滅不久耳."遂自殺。慕容寶到薊城後,在慕容盛等人反對下沒有回龍城,轉而想南投慕容德,可是在知道慕容德已稱燕王後就不敢繼續前進。當時慕容盛等人在冀州成功招集了一些支持慕容寶的力量,但其時蘭汗又派人來迎慕容寶,慕容寶以為蘭汗是忠臣,又想到蘭汗是父親慕容垂的舅舅,於是都不再懷疑,決意回龍城。慕容寶快到龍城時,蘭汗就派了弟蘭加難去迎接,但同時又命兄蘭堤封閉城門,最終蘭加難引慕容寶到龍城外邸並將之殺害,享年四十四歲。蘭汗諡慕容寶為靈帝,又殺太子慕容策及王公大臣,自稱大都督、大將軍、大單于,昌黎王。不久慕容盛殺蘭汗,改慕容寶諡號為惠愍皇帝,上廟號烈宗.)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廣開土太王> [본문]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 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 2월, 연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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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초, 북위와 후연, 북연의 정세도.. 왜곡된 지도지만 당시 어떤 국가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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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와 전쟁에 대비한 후연의 수도 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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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 나타난 모용보, 당시 배우 임호가 열연했다.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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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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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8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10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9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2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6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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