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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3     조회 : 456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한수를 따라 내려왔다. 이에 맞서는 동진은 환온의 동생 환충(桓沖)이 지휘하는 서부군이 형주에서 부견의 측면 군대를 요격하거나 배후를 치는 역할을 하였고 사안(謝安)이 지휘하는 북부는 서주와 양주(揚州) 지역에서 부견을 직접 맞는 포석을 두었다.


같은 해 10월, 부융(符融)이 이끄는 선봉부대가 사수(泗水)에 도달하여 사안을 압박했고 모용수의 군대는 운성(韻城)을 점령하고 환충을 압박했다. 전진의 부견은 첫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인 건업을 압박하기 위해 회수로 진군하였다. 일단 모용수가 측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환충을 제압했지만 전쟁의 핵심은 수도 건강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회수 방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용수는 운성 점령을 끝으로 특별한 군사 활동은 보이지 않고 환충을 압박하는데 전념했다. 부견은 군을 이끌고 비수(淝水)에서 동진군과 맞섰다. 동진의 명장 사석(謝石)은 저돌적으로 비수를 건너 전진군을 공격했고 전진의 100만 대군은 비수에 대패하고 말았다. 100만 대군은 거의 전멸했고 살아남은 군대는 모용수가 환충의 군대를 측면에서 사수하던 3만명이 전부였다. 모용수는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부견을 호위하여 도성에 들어가려 하였다. 한편 동진군은 전진군을 추격하여 전진의 부견과 전연의 모용준에게 함락당했던 낙양을 탈환했고 하남성 지역과 호북성 지역의 성들을 모두 탈환했다. 그리고 전진의 부견은 강족의 족장인 요장에게 암살당하고 전진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정령의 적빈(翟斌)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수가 이를 토벌하러 출정하는 도중 384년 정월, 모용수는 모반을 일으켜 하북 일대를 도리어 장악하고 다시 연왕(燕王)을 참칭했다. 그러자 하북 각지의 옛 전연의 세력들이 모용수의 후연에 투항하면서 모용수의 세력은 순식간에 20여 만으로 불어났다. 모용수는 옛 전연의 수도였던 업을 포위했다. 한편 업 인근의 열인(列人)에서는 모용농(慕容農)을 필두로 모용수의 일족들이 옛 전연의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업의 성주 부비(苻丕)는 열인의 반군을 먼저 격파할 요량으로 1만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모용농에게 완패했다. 이 패배로 인해 부비는 하북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한편 장안 북방의 북지(北地)를 지키고 있던 모용홍(慕容泓)은 모용수가 다시 하북 각지를 장악하고 연의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관동의 선비족을 포섭하고 화음(華陰)에서 모반을 일으켜 제북왕(濟北王)을 자칭하였다. 또한 병주의 평양(平陽)에 주둔하고 있던 모용충(慕容沖)도 자립하여 포판을 공격하였다.


모용수는 적빈(翟斌)의 군대까지 흡수했고 385년 부비가 업을 버리고 달아나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성 전 지역을 점령했다. 그리고 황하 이북 지역으로 북상해 오는 동진의 세력을 격파하고 동진의 황하 이북 진주를 저지했다. 그리고 백제가 점거하고 있던 요서 지역을 다시 탈환하여 옛 전연의 영토를 거의 탈환하였다. 그리고 386년에는 황제에 즉위하여, 수도를 중산(中山)에 정했다. 그리고 나라이름을 그대로 연(燕)이라 하였으며 이를 후기 사가에서는 후연(後燕)이라 불린다. 모용수의 이러한 빠른 행보에 대해서는 전연이 멸망하고 전진 부견의 치세에 있으면서 미리 계획했던 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평소에 전연의 옛 세력과도 잘 연계가 되어 있었던 것도 빠른 조치의 원인으로 보았다.


일찍이 모용수가 전연의 모용평, 모용위에게 쫓겨 망명해 들어오자 부견의 책사 왕맹은 “모용수는 걸물이며, 용이나 맹수는 길들일 수 없다. 이건 죽여야 하는 것이다.” 라고 진언한적 있었다. 그러나 부견은 모용수의 능력을 매우 높이 사고 있었고 오히려 그러한 진언을 물리치고 모용수를 중용했다. 그리고 모용수는 이러한 배경을 틈타 전연의 멸망 이후에도 옛 전연 세력과 끊임없는 연계를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서(晉書)』, 卷 百十一,「載記」, 第十一, <苻堅傳> [본문] 强弱異勢,不如速降。此亦勁敵,何謂弱也!君懸軍深入,而置陳逼水,此乃持久之計,非欲速戰者也。若移陣小却,使晉兵得渡,以決勝負,不亦善乎, 秦兵敗矣. 晉將軍硃綽焚踐沔北屯田,掠六百餘戶而還。堅引群臣會議,曰:「吾統承大業垂二十載,芟夷逋穢,四方略定,惟東南一隅未賓王化。吾每思天下不一,未嘗不臨食輟餔,今欲起天下兵以討之。略計兵杖精卒,可有九十七萬,吾將躬先啟行,薄伐南裔,于諸卿意何如?」秘書監硃彤曰:「陛下應天順時,恭行天罰,嘯吒則五嶽摧覆,呼吸則江海絕流,若一舉百萬,必有征無戰。晉主自當銜璧輿櫬,啟顙軍門,若迷而弗悟,必逃死江海,猛將追之,即可賜命南巢。中州之人,還之桑梓。然後回駕岱宗,告成封禪,起白雲於中壇,受萬歲於中嶽,爾則終古一時,書契未有。」堅大悅曰:「吾之志也。」左僕射權翼進曰:「臣以為晉未可伐。夫以紂之無道,天下離心,八百諸侯不謀而至,武王猶曰彼有人焉,回師止旆。三仁誅放,然後奮戈牧野。今晉道雖微,未聞喪德,君臣和睦,上下同心。謝安、桓沖,江表偉才,可謂晉有人焉。臣聞師克在和,今晉和矣,未可圖也。」堅默然久之,曰:「諸君各言其志。」太子左衛率石越對曰:「吳人恃險偏隅,不賓王命,陛下親禦六師,問罪衡、越,誠合人神四海之望。但今歲鎮星守鬥牛,福德有吳。懸象無差,弗可犯也。且晉中宗,籓王耳,夷夏之情,鹹共推之,遺愛猶在於人。昌明,其孫也,國有長江之險,朝無昏貳之釁。臣愚以為利用修德,未宜動師。孔子曰:'遠人不服,修文德以來之。'願保境養兵,伺其虛隙。」堅曰:「吾聞武王伐紂,逆歲犯星。天道幽遠,未可知也。昔夫差威陵上國,而為句踐所滅。仲謀澤洽全吳,孫皓因三代之業,龍驤一呼,君臣面縛,雖有長江,其能固乎!以吾之眾旅,投鞭于江,足斷其流。」越曰:「臣聞紂為無道,天下患之。夫差淫虐,孫皓昏暴,眾叛親離,所以敗也。今晉雖無德,未有斯罪,深願厲兵積粟以待天時。」群臣各有異同,庭議者久之。堅曰:「所謂築室於道,沮計萬端,吾當內斷於心矣。」群臣出後,獨留苻融議之。堅曰:「自古大事,定策者一兩人而已,群議紛紜,徒亂人意,吾當與汝決之」融曰:「歲鎮在鬥牛,吳、越之福,不可以伐一也。晉主休明,朝臣用命,不可以伐二也。我數戰,兵疲將倦,有憚敵之意,不可以伐三也。諸言不可者,策之上也,願陛下納之。」堅作色曰:「汝複如此,天下之事,吾當誰與言之!今有眾百萬,資仗如山,吾雖未稱令主,亦不為暗劣。以累捷之威,擊垂亡之寇,何不克之有乎!吾終不以賊遺子孫,為宗廟社稷之憂也。」融泣曰:「吳之不可伐昭然,虛勞大舉,必無功而反。臣之所憂,非此 而已。陛下寵育鮮卑、羌、羯,布諸畿甸,舊人族類,斥徙遐方。今傾國而去,如有風塵之變者,其如宗廟何!監國以弱卒數萬留守京師,鮮卑、羌、羯攢聚如林,此皆國之賊也,我之仇也。臣恐非但徒返而已,亦未必萬全。臣智識愚淺,誠不足采;王景略一時奇士,陛下每擬之孔明,其臨終之言不可忘也。」堅不納。游于東苑,命沙門道安同輦。權翼諫曰:「臣聞天子之法駕,侍中陪乘,清道而行,進止有度。三代末主,或虧大倫,適一時之情,書惡來世。故班姬辭輦,垂美無窮。道安毀形賤士,不宜參穢神輿。」堅作色曰:「安公道冥至境,德為時尊。朕舉天下之重,未足以易之。非公與輦之榮,此乃朕之顯也。」命翼扶安升輦,顧謂安曰:「朕將與公南游吳、越,整六師而巡狩,謁虞陵於疑嶺,瞻禹穴於會稽,泛長江,臨滄海,不亦樂乎!」安曰:「陛下應天禦世,居中土而制四維,逍遙順時,以適聖躬,動則鳴鑾清道,止則神棲無為,端拱而化,與堯、舜比靈斯,何為勞身於馳騎,口倦於經略,櫛風沐雨。蒙塵野次乎?且東南區區,地下氣癘,虞舜遊而不返,大禹適而弗歸,何足以上勞神駕,下困蒼生。《詩》雲:'惠此中國,以綏四方。'苟文德足以懷遠,可不煩寸兵而坐賓百越。」堅曰:「非為地不廣、人不足也,但思混一六合,以濟蒼生。天生蒸庶,樹之君者,所以除煩去亂,安得憚勞!朕既大運所鐘,將簡天心以行天罰。高辛有熊泉之役,唐堯有丹水之師,此皆著之前典,昭之後王。誠如公言,帝王無省方之文乎?且朕此行也,以義舉耳,使流度衣冠之胄,還其墟墳,複其桑梓,止為濟難銓才,不欲窮兵極武。」安曰:「若鑾駕必欲親動,猶不願遠涉江、淮,可暫幸洛陽,明授勝略,馳紙檄於丹陽,開其改迷之路。如其不庭,伐之可也。」堅不納。先是,群臣以堅信重道安,謂安曰:「主上欲有事于東南,公何不為蒼生致一言也!」故安因此而諫。苻融及尚書原紹、石越等上書面諫,前後數十,堅終不從。堅少子中山公詵有寵於堅,又諫曰:「臣聞季梁在隨,楚人憚之;宮奇在虞,晉不窺兵。國有人焉故也。及謀之不用,而亡不淹歲。前車之覆軌,後車之明鑒。陽平公,國之謀主,而陛下違之;晉有謝安、桓沖,而陛下伐之。是行也,臣竊惑焉。」堅曰:「國有元龜。可以決大謀;朝有公卿,可以定進否。孺子言焉,將為戮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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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명군 부견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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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秦)의 시조 요장(姚萇), 그는 전진의 부견을 살해하고 전진을 멸했으며 이어 후진을 건국했다. 그는 강족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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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 등장하는 후연의 초대 황제 모용수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6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7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09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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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4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1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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