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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3     조회 : 456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왕맹의 전략적 주도로 동진의 형주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왕맹이 친정하여 367년에는 농서의 이엄을 정벌하였다. 그러나 전진의 왕족들 중 일부가 왕맹의 정책에 비난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전진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전연에 입장에서는 전진을 정벌할 좋은 기회였으나 태재인 모용평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전연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전진의 내분을 격화시키기 위해 내란에 적극 개입하여 이익을 취했다면 전진이 아닌 전연이 화북을 통일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전진의 부견과 왕맹은 왕족들의 반란을 제압하면서 천천히 내부의 내분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진의 중앙 집권화를 위해서 필수불가인 상황이었다.368년 한 해를 반란 진압으로 시간을 소비할 동안 전연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연의 개입이 없었기에 부견의 반란 평정은 어렵지 않게 성공하였고 내부의 결속력도 다지며 다시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369년 동진의 환온이 전연을 공격하기 위하여 5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리고 전연의 군사들과 싸워 승리하고 환온은 황하를 건너 방두(枋頭)에 주둔하였다. 겨울이 가까워 오자 환온은 황하가 얼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강이 얼은 것을 틈타 기병들을 이끌고 수도인 업성을 공격하려는 전략이었다. 황제 모용위와 태재 모용평을 업성을 버리고 용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모용수가 이를 반대하였고 곧 5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환온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용위는 전진으로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조건으로 호뢰관(虎牢關) 서쪽의 땅을 할양하고 사주(司州) 전체에 달하는 영역에서 군을 철수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자 전진의 부견은 이에 대한 조건을 수락하고 동진의 북벌군과 전연을 모두 제압할 전략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낙양을 거쳐 영천(穎川)으로 진출하고 전연에 사신을 보내 구원군 파견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아직 동진군과 교전하지는 않았지만 배후를 위협하면서 환온의 보급대를 노렸다. 그러나 환온과 맞서 있는 모용수는 환온이 이끄는 동진군과 환온의 동진 조정에서의 위치, 동진의 다른 신하들과의 관계 등 환온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환온이 동진 내부에서 정권을 잡고 권세를 누린지 10년이 지났으며 환온의 세도에 반기를 드는 신하들도 생겨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환온은 적당히 싸우다 어려워지면 퇴각하고 상황이 좋게 흘러가면 전연을 멸망시켜 공을 세우려는 두 가지의 작전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최소의 손해를 보면서 이득을 취하려 하였고 여차하면 회군이 가능하게 모든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환온의 작전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불안정한 보급이 문제였고 전진의 부견이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전연의 모용덕(慕容德) 등이 환온의 배후를 돌아 보급로를 끊었고 이에 전진의 원군이 합류하자 환온은 군사를 거두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모용수는 8천의 기병을 이끌고 양읍(襄邑)까지 추격했고 양읍에서 매복 작전을 펼치며 환온을 격퇴했다. 그리고 모용수는 모용평과 황제인 모용위가 그를 죽이려 하자 전진으로 달아나 부견에게 항복했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고 마침내 369년에 사자를 보내 약속했던 호뢰관(虎牢關) 서쪽의 땅을 할양하고 사주(司州) 전체에 달하는 영역에서 군을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모용평과 황제 모용위는 이를 거부했고 전진의 부견은 왕맹(王猛)에게 군사를 주어 전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전쟁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전연은 거듭 패배하여 수도인 업(鄴)이 쉽게 함락되었고 황제인 모용위는 전진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모용평은 고구려로 도주했다.* 이렇게 하여 전연은 전진에게 멸망하고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와 신흥후(新興侯)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진의 부견이 동진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모용수가 독립하여 다시 연(燕)나라를 재건하니 이를 후연(後燕)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故國原王> [본문] 40년(서기 370년),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격파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우리나라로 쫓겨 왔다. 임금이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 四十年, 秦王猛, 伐燕破之, 燕太傅慕容評來奔, 王執送於秦.


전연은 요동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요서,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북부, 하남성 까지 진출하였으며 5호 16국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여 강대국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용준이 황제로 칭제하여 화북의 동쪽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강화했으며 한족과 동화되지 않는 선비족이 지배층으로 존재했던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부여와의 전쟁을 승리를 거두어 단군조선의 후예로 정통성을 칭한 몇 안 되는 기마유목민족 국가이기도 했다. 본연의 기마유목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 농업을 적극적으로 접목하여 정주문화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들은 후일 북위와 고구려에 모두 흡수되어 북위, 고구려의 중기문화 형성에 공헌하였다. 이렇게 모용선비의 전연이 멸망함에 따라 화북은 전진이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모용선비는 전진에 예속하게 되었다.


『진서(晉書)』, 卷 百十一,「載記」, 第十一, <慕容暐傳> [본문] 暐遣其甯東慕容忠攻陷滎陽,又遣鎮南慕容塵寇長平。時晉冠軍將軍陳祐戍洛陽,遣使請救,帝遣桓溫援之. 興甯初,暐複使慕容評寇許昌、懸瓠、陳城,並陷之,遂略汝南諸郡,徙萬余戶于幽、冀。豫州刺史孫興上疏,請步卒五千先圖洛陽。暐納之,遣其太宰司馬悅希軍於盟津,孫興分戍成皋,以為之聲援。尋而陳祐率眾奔陸渾,河南諸壘悉陷於希。慕容恪攻陷金墉,害揚威將軍沈勁。以其左中郎將慕容築為假節、征虜將軍、洛州刺史,鎮金墉,慕容垂為都督荊、揚、洛、徐、兗、豫、雍、益、梁、秦等十州諸軍事、征南大將軍、荊州牧,配兵一萬,鎮魯陽。時暐境內多水旱,慕容恪、慕容評並稽首歸政,請遜位還第,曰:「臣以朽暗,器非經國,過荷先帝拔擢之恩,又蒙陛下殊常之遇,猥以輕才,竊位宰錄,不能上諧陰陽,下厘庶政,致使水旱愆和,彝倫失序,轅弱任重,夕惕唯憂。臣聞王者則天建國,辨方正位,司必量才,官惟德舉。台傅之重,參理三光,苟非其人,則靈曜為虧。屍祿貽殃,負乘招悔,由來常道,未之或差。以姬旦之勳聖,猶近則二公不悅,遠則管、蔡流言,況臣等寵緣戚來,榮非才授,而可久點天官,塵蔽賢路!是以中年拜表,披陳丹款。聖恩齒舊,未忍遐棄,奄冉偷榮,愆責彌厚。自待罪鼎司,歲余辰紀;忝冒宰衡,七載於茲。雖乃心經略,而思不周務,至令二方幹紀,跋扈未庭,同文之詠,有慚盛漢,深乖先帝託付之規,甚違陛下垂拱之義。臣雖不敏,竊聞君子之言,敢忘虞丘避賢之美,輒循兩疏知止之分,謹送太宰、大司馬、太傅、司徒章綬,惟垂昭許。」暐曰:「朕以不天,早傾乾覆,先帝所托,唯在二公。二公懿親碩德,勳高魯、衛,翼贊王室,輔導朕躬,宣慈惠和,坐而待旦,虔誠夕惕,美亦至矣。故能外掃群凶,內清九土,四海晏如,政和時洽。雖宗廟社稷之靈,抑亦公之力也。今關右有未賓之氐,江、吳有遺燼之虜,方賴謀猷,混寧六合,豈宜虛己謙沖,以違委任之重!王其割二疏獨善之小,以成公旦複袞之大」恪、評等固請致政,暐曰:「夫建德者必以終善為名,佐命者則以功成為效。公與先帝開構洪基,膺天明命,將廓夷群醜,紹複隆周之跡。災眚橫流,乾光墜曜。朕以眇躬,猥荷大業,不能上成先帝遺志,致使二虜遊魂,所以功未成也,豈宜沖退。且古之王者,不以天下為榮,憂四海若荷擔,然後仁讓之風行,則比屋而可封。今道化未純,鯨鯢未殄,宗社之重,非唯朕身,公所憂也。當思所以寧濟兆庶,靖難敦風,垂美將來,侔蹤周、漢,不宜崇飾常節,以違至公。」遂斷其讓表,恪、評等乃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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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과 전진의 대립 형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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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과 전진의 전쟁도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6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399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7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09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8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1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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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4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4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1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8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6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7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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