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등과 함께 전군 8만을 이끌고 새북(塞北)에서 정령(丁零)과 칙륵(敕勒)을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10여 만 명을 도륙했다. 정령과 칙륵의 본거지로 들어가 말(馬) 13만 필을 노획하고 많은 양의 소(牛)와 양(羊)을 탈취했다.
같은 해 흉노선우(匈奴單于) 하뢰두(賀賴頭)가 부락(部落) 3만 5천을 이끌고 모용준에게 항복하니 그를 영서장군(寧西將軍) 운중군공(雲中郡公)으로 삼아 대군(代郡) 평서성(平舒城)에 거처하게 하였다. 동진의 태산태수(太山太守) 제갈유(諸葛攸)가 모용준의 동군(東郡)를 공격했다.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맞서 싸우게 하니 진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북중랑장(北中郞將) 사만(謝萬)이 앞서서 양(梁), 송(宋)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패전을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모용각이 남진(南進)하여 하수 남쪽으로 들어와 침범하자 여(汝), 영(潁), 초(譙), 패(沛)가 모두 함락되었고, 모용각은 점령 지역에 지방관을 둔 뒤에 돌아갔다.*
* 『진서(晉書)』, 卷 八,「목제기(穆帝紀)」, 第 八. [본문] 秋八月, 安西將軍謝奕卒. 壬申, 以吳興太守謝萬爲西中郞將、持節、監司豫冀幷四州諸軍事、豫州刺史以散騎常侍郗曇爲北中郞將、持節、都督徐兗靑冀幽五州諸軍事、徐兗二州刺史, 鎭下邳. 十二月, 北中郞將荀羨及慕容儁戰于山茌, 王師敗績. 冬十月慕容儁寇東阿, 遣西中郞將謝萬次下蔡, 北中郞將郗曇次高平以擊之, 王師敗績. ;『연서(燕書)』, 考異曰:帝紀:[본문]「謝萬爲豫州,下云:「郗曇爲北中郞將,督五州軍事、徐兗二州刺史.)曇傳云:「荀羨有疾,以曇爲軍司. 頃之, 羨徵還, 除曇北中郎將、都督、刺史.)按帝紀,「十二月, 北中郞將荀羨及慕容儁戰于山茌, 王師敗績.)燕書:「十二月, 荀羨寇泰山, 殺太守賈堅。)載記:「荀羨殺賈堅,)下云:「敗羨山茌.)故知八月曇未爲徐、兗二州, 恐始爲軍司耳.) ;『진서(晉書)』, 卷 十三, 「천문지(天文志)」下, 第 十 [본문] 八月丁未, 太白犯軒轅大星. 甲子, 月犯畢大星. 占曰:「爲邊兵.」一曰:「下犯上.」三年十月, 諸葛攸舟軍入河, 敗績. 豫州刺史謝萬入潁, 衆潰而歸, 萬除名. ; (승평 3년 (359년) 8월 정미일(1일), 태백(太白)이 헌원대성(軒轅大星)을 범했다. 갑자일(18일), 달이 필대성(畢大星)을 범했다. 점을 쳐보니 “변경에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는 “아래(下)가 위(上)를 범한다.”라고 하였다. 승평 3년 10월, 제갈유(諸葛攸)가 주군(舟軍)으로 하수로 들어갔다가 패적(敗績)하였다. 예주자사 사만(謝萬)은 영(潁)으로 들어갔다가 군대가 붕궤된 뒤에 돌아오니 사만이 제명(除名)되었다.
359년 모용준이 계성(薊城)으로부터 업(鄴)으로 천도하고는 그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궁전을 수리하고 동작대(銅雀臺)를 복구했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卷 一百,「진기(晉紀)」, 第 九 <昇平三年> [본문] 十二月, 乙巳, 燕主儁入鄴宮, 大赦. 復作銅雀臺. [魏武建國於鄴, 作銅雀臺, 石氏增修之, 兵亂圮毀, 慕容都鄴復作, 使如舊.] ; (357년) 12월 을사일(19일), 연주(燕主) 모용준이 업궁(鄴宮)으로 들어와 대 사면령을 내렸다. 동작대를 다시 만들었다. [위 무제(→조조)가 업에서 건국하고 동작대를 만들고 석씨(石氏)가 이를 증수(增修)하였다가 병란으로 허물어졌는데 모용씨가 업에 도읍하며 예전과 같도록 다시 만든 것이다.
창려(昌黎), 요동(遼東) 2군(郡)으로 하여금 모용외(慕容廆)의 묘(廟)를 세우도록 하고 범양(范陽), 연군(燕郡)에는 모용황(慕容皝)의 묘(廟)를 짓도록 하고는 호군(護軍)인 평희(平熙)에게 장작대장(將作大匠)을 겸하게 하여 두 개의 묘를 짓는 것을 감독하게 했다. 이와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부견(苻堅)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유특(劉特)이 호(戶) 5천을 이끌고 모용준에게 항복했다. 이후 하간(河間) 사람인 이흑(李黑)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주군(州郡)을 공략하고 조강령(棗彊令) 위안(衛顔)을 죽이니, 모용준의 장락태수(長樂太守) 부안(傅顔)이 이를 쳐서 이흑을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모용준이 사도(司徒) 모용평(慕容評)을 보내 장평(張平)을 치고, 영군장군(領軍將軍) 모여근(慕輿根)을 보내 풍앙(馮鴦)을 치고, 사공(司空) 양무(陽騖)를 보내 고창(高昌)을 치고, 무군장군(撫軍將軍) 모용장(慕容臧)을 보내 이력(李歷)을 쳤다. 병주(幷州)의 성벽 아래에서 항복한 곳이 백여 마을에 이르니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열관(悅綰)을 안서장군(安西將軍), 영(領)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郞將), 병주자사로 삼아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장평이 서임한 정서장군(征西將軍) 제갈양(諸葛驤), 진북장군(鎭北將軍) 소상(蘇象), 영동장군(寧東將軍) 교서(喬庶), 진남장군(鎭南將軍) 석현(石賢) 등이 누벽(壘壁)* 138개 소를 이끌고 모용준에게 항복하니 모용준이 크게 기뻐하며 모두 그들의 원래 관작(官爵)으로 복구시켜주었다. 얼마 뒤에 장평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평양(平陽)으로 달아나고, 풍앙은 야왕(野王)으로 달아나고, 이력은 형양(滎陽)으로 달아나고, 고창은 소릉(邵陵)으로 달아났고, 모용준이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항복시켰다.
* 누벽(壘壁)은 후한 말 이래 치안이 불안해지자 자체방위를 위해 보루나 방벽 등을 쌓은 요새화된 거주지를 말한다. 벽루(壁壘)라고도 한다.
같은 해 모용준이 다시 남쪽으로 침범할 것을 꾀함과 동시에 전진(前秦)의 관서(關西)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에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호적에 등재된 장정들을 검열하고 은루(隱漏)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각 호(戶)에 1정(丁)을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을 모두 징발함으로써 보병들을 150만으로 채우도록 하고, 다음해인 360년에 군사를 대거 집결시켜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였다. 진격 이후 3방(三方)의 절도(節度)를 두려고 하였다.
무읍(武邑) 사람인 유귀(劉貴)가 상서해 극간(極諫)하여, 백성들이 피폐하고 그렇게 군사를 소집하는 것은 법(法)에 부합하지 않고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땅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큰 재앙이 있을까 두렵다고 진술하였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정책이 시의에 부합하지 않는 13가지 사안을 진술하였다. 모용준이 이를 읽어보고는 기뻐하며 공경(公卿)들에게 맡겨 널리 의논하게 하니 유귀가 진술한 사안 다수가 채용되었다. 그리하여 징병 방식을 삼오점병(三五占兵)으로 고치고 군비를 1주를 늦추어주어 모두 다음 해 말 겨울에 업도(鄴都)로 와서 집결하도록 영을 내렸다. 이 해에 동진의 장수 순선(荀羨)이 산치(山茌)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모용준의 태산태수(太山太守) 가견(賈堅)을 죽였다. 이에 청주자사 모용진(慕容塵)이 사마(司馬) 열명(悅明)을 보내 이를 구원하니 순선이 패배하고 열명이 다시 산치(山茌)를 함락하였다. 제갈유(諸葛攸)가 다시 수군과 육군 3만을 이끌고 모용준을 치니 석문(石門)으로부터 들어와 하수(河水)가에 주둔했다. 제갈유의 부장(部將) 광초(匡超)가 진격하여 고오(嵪㠂)를 점거하고 소관(蕭館)은 신책(新柵)에 주둔하였다. 또한 독호(督護) 서경(徐冏)을 보내 수군(水軍) 3천을 이끌고 배를 띄워 강을 오르내리며 동쪽과 서쪽의 군대를 위해 지원하였다. 모용준이 모용평(慕容評), 부안(傅顔) 등을 보내 5만의 군사들을 통솔하게 하니 동아(東阿)에서 싸워 동진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그러자 새북(塞北)의 7국인 하란(賀蘭), 섭륵(涉勒)등이 모두 항복하여 북방이 거의 평정되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군사적 공격에서 전연은 매우 안정된 상황을 맞이했고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해 현현리(顯賢里)에 소학(小學)을 세워 제후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황자인 모용홍(慕容泓)을 제북왕(濟北王), 모용충(慕容沖)을 중산왕(中山王)으로 봉하면서 외부에서 공격하는 5호와 동진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학문을 강연하는 도중 포지(蒲池)에서 다른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주흥이 오르자 시(詩)를 읊으며 경전과 역사에 관하여 담론하였다. 전연은 요동과 요서, 산동성, 하북성, 산서성 북부 지역을 장악하여 제국으로 성장하였고 동진이 남방에서 문화적인 부분을 발전시켰다면 전연은 북방에서 선비 = 한족이 섞인 독특한 문화를 창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문화는 북위가 건국되자 모두 흡수되었고 북위는 전연과는 다른 색체의 문화를 종교적인 부분을 강화시킴으로써 화북문화(華北文化)의 시초가 되었다.
360년에 모용준(慕容儁)이 죽으니 당시 나이는 42세였고 11년 간 재위하였다. 뒤를 이은 모용위가 시호를 내려 경소황제(景昭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는 열조(烈祖), 묘호(墓號)는 용릉(龍陵)이라 하여 장사지냈다. 전연은 모용준이 죽고 나서 몇 년 뒤 모용각 마저 죽자 급격히 쇠퇴하였다. 모용황, 모용준이라는 강력한 통치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모용위가 정치적인 구심점이 되기에는 모용황, 모용준, 모용각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이러한 가운데 전연에 압제되어 있던 다른 북방민족들이 다시 전연에 도전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은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전연이 다스리고 모용준이 다스리던 하북성 창려시의 모습
산서진충도, 전연 모용준이 저족의 부견이 강성해지자 이를 공략하기 위하여 산서성 알대의 주요 지역들을 직접 탐방하였다 전해진다.
하북성 창려시 노룡현 갈석산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