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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23     조회 : 474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등과 함께 전군 8만을 이끌고 새북(塞北)에서 정령(丁零)과 칙륵(敕勒)을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10여 만 명을 도륙했다. 정령과 칙륵의 본거지로 들어가 말(馬) 13만 필을 노획하고 많은 양의 소(牛)와 양(羊)을 탈취했다.


같은 해 흉노선우(匈奴單于) 하뢰두(賀賴頭)가 부락(部落) 3만 5천을 이끌고 모용준에게 항복하니 그를 영서장군(寧西將軍) 운중군공(雲中郡公)으로 삼아 대군(代郡) 평서성(平舒城)에 거처하게 하였다. 동진의 태산태수(太山太守) 제갈유(諸葛攸)가 모용준의 동군(東郡)를 공격했다. 모용준이 모용각(慕容恪)을 보내 맞서 싸우게 하니 진나라 군대가 패배하였다. 북중랑장(北中郞將) 사만(謝萬)이 앞서서 양(梁), 송(宋)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패전을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모용각이 남진(南進)하여 하수 남쪽으로 들어와 침범하자 여(汝), 영(潁), 초(譙), 패(沛)가 모두 함락되었고, 모용각은 점령 지역에 지방관을 둔 뒤에 돌아갔다.*


* 『진서(晉書)』, 卷 八,「목제기(穆帝紀)」, 第 八. [본문] 秋八月, 安西將軍謝奕卒. 壬申, 以吳興太守謝萬爲西中郞將、持節、監司豫冀幷四州諸軍事、豫州刺史以散騎常侍郗曇爲北中郞將、持節、都督徐兗靑冀幽五州諸軍事、徐兗二州刺史, 鎭下邳. 十二月, 北中郞將荀羨及慕容儁戰于山茌, 王師敗績. 冬十月慕容儁寇東阿, 遣西中郞將謝萬次下蔡, 北中郞將郗曇次高平以擊之, 王師敗績. ;『연서(燕書)』, 考異曰:帝紀:[본문]「謝萬爲豫州,下云:「郗曇爲北中郞將,督五州軍事、徐兗二州刺史.)曇傳云:「荀羨有疾,以曇爲軍司. 頃之, 羨徵還, 除曇北中郎將、都督、刺史.)按帝紀,「十二月, 北中郞將荀羨及慕容儁戰于山茌, 王師敗績.)燕書:「十二月, 荀羨寇泰山, 殺太守賈堅。)載記:「荀羨殺賈堅,)下云:「敗羨山茌.)故知八月曇未爲徐、兗二州, 恐始爲軍司耳.) ;『진서(晉書)』, 卷 十三, 「천문지(天文志)」下, 第 十 [본문] 八月丁未, 太白犯軒轅大星. 甲子, 月犯畢大星. 占曰:「爲邊兵.」一曰:「下犯上.」三年十月, 諸葛攸舟軍入河, 敗績. 豫州刺史謝萬入潁, 衆潰而歸, 萬除名. ; (승평 3년 (359년) 8월 정미일(1일), 태백(太白)이 헌원대성(軒轅大星)을 범했다. 갑자일(18일), 달이 필대성(畢大星)을 범했다. 점을 쳐보니 “변경에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는 “아래(下)가 위(上)를 범한다.”라고 하였다. 승평 3년 10월, 제갈유(諸葛攸)가 주군(舟軍)으로 하수로 들어갔다가 패적(敗績)하였다. 예주자사 사만(謝萬)은 영(潁)으로 들어갔다가 군대가 붕궤된 뒤에 돌아오니 사만이 제명(除名)되었다.


359년 모용준이 계성(薊城)으로부터 업(鄴)으로 천도하고는 그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고 궁전을 수리하고 동작대(銅雀臺)를 복구했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卷 一百,「진기(晉紀)」, 第 九 <昇平三年> [본문] 十二月, 乙巳, 燕主儁入鄴宮, 大赦. 復作銅雀臺. [魏武建國於鄴, 作銅雀臺, 石氏增修之, 兵亂圮毀, 慕容都鄴復作, 使如舊.] ; (357년) 12월 을사일(19일), 연주(燕主) 모용준이 업궁(鄴宮)으로 들어와 대 사면령을 내렸다. 동작대를 다시 만들었다. [위 무제(→조조)가 업에서 건국하고 동작대를 만들고 석씨(石氏)가 이를 증수(增修)하였다가 병란으로 허물어졌는데 모용씨가 업에 도읍하며 예전과 같도록 다시 만든 것이다.


창려(昌黎), 요동(遼東) 2군(郡)으로 하여금 모용외(慕容廆)의 묘(廟)를 세우도록 하고 범양(范陽), 연군(燕郡)에는 모용황(慕容皝)의 묘(廟)를 짓도록 하고는 호군(護軍)인 평희(平熙)에게 장작대장(將作大匠)을 겸하게 하여 두 개의 묘를 짓는 것을 감독하게 했다. 이와 같은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부견(苻堅)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유특(劉特)이 호(戶) 5천을 이끌고 모용준에게 항복했다. 이후 하간(河間) 사람인 이흑(李黑)이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주군(州郡)을 공략하고 조강령(棗彊令) 위안(衛顔)을 죽이니, 모용준의 장락태수(長樂太守) 부안(傅顔)이 이를 쳐서 이흑을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모용준이 사도(司徒) 모용평(慕容評)을 보내 장평(張平)을 치고, 영군장군(領軍將軍) 모여근(慕輿根)을 보내 풍앙(馮鴦)을 치고, 사공(司空) 양무(陽騖)를 보내 고창(高昌)을 치고, 무군장군(撫軍將軍) 모용장(慕容臧)을 보내 이력(李歷)을 쳤다. 병주(幷州)의 성벽 아래에서 항복한 곳이 백여 마을에 이르니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열관(悅綰)을 안서장군(安西將軍), 영(領)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郞將), 병주자사로 삼아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장평이 서임한 정서장군(征西將軍) 제갈양(諸葛驤), 진북장군(鎭北將軍) 소상(蘇象), 영동장군(寧東將軍) 교서(喬庶), 진남장군(鎭南將軍) 석현(石賢) 등이 누벽(壘壁)* 138개 소를 이끌고 모용준에게 항복하니 모용준이 크게 기뻐하며 모두 그들의 원래 관작(官爵)으로 복구시켜주었다. 얼마 뒤에 장평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평양(平陽)으로 달아나고, 풍앙은 야왕(野王)으로 달아나고, 이력은 형양(滎陽)으로 달아나고, 고창은 소릉(邵陵)으로 달아났고, 모용준이 나머지 무리들을 모두 항복시켰다.


* 누벽(壘壁)은 후한 말 이래 치안이 불안해지자 자체방위를 위해 보루나 방벽 등을 쌓은 요새화된 거주지를 말한다. 벽루(壁壘)라고도 한다.


같은 해 모용준이 다시 남쪽으로 침범할 것을 꾀함과 동시에 전진(前秦)의 관서(關西)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에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호적에 등재된 장정들을 검열하고 은루(隱漏)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각 호(戶)에 1정(丁)을 남겨두고 나머지 장정들을 모두 징발함으로써 보병들을 150만으로 채우도록 하고, 다음해인 360년에 군사를 대거 집결시켜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였다. 진격 이후 3방(三方)의 절도(節度)를 두려고 하였다.


무읍(武邑) 사람인 유귀(劉貴)가 상서해 극간(極諫)하여, 백성들이 피폐하고 그렇게 군사를 소집하는 것은 법(法)에 부합하지 않고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땅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큰 재앙이 있을까 두렵다고 진술하였다. 아울러 당시의 정치, 정책이 시의에 부합하지 않는 13가지 사안을 진술하였다. 모용준이 이를 읽어보고는 기뻐하며 공경(公卿)들에게 맡겨 널리 의논하게 하니 유귀가 진술한 사안 다수가 채용되었다. 그리하여 징병 방식을 삼오점병(三五占兵)으로 고치고 군비를 1주를 늦추어주어 모두 다음 해 말 겨울에 업도(鄴都)로 와서 집결하도록 영을 내렸다. 이 해에 동진의 장수 순선(荀羨)이 산치(山茌)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모용준의 태산태수(太山太守) 가견(賈堅)을 죽였다. 이에 청주자사 모용진(慕容塵)이 사마(司馬) 열명(悅明)을 보내 이를 구원하니 순선이 패배하고 열명이 다시 산치(山茌)를 함락하였다. 제갈유(諸葛攸)가 다시 수군과 육군 3만을 이끌고 모용준을 치니 석문(石門)으로부터 들어와 하수(河水)가에 주둔했다. 제갈유의 부장(部將) 광초(匡超)가 진격하여 고오(嵪㠂)를 점거하고 소관(蕭館)은 신책(新柵)에 주둔하였다. 또한 독호(督護) 서경(徐冏)을 보내 수군(水軍) 3천을 이끌고 배를 띄워 강을 오르내리며 동쪽과 서쪽의 군대를 위해 지원하였다. 모용준이 모용평(慕容評), 부안(傅顔) 등을 보내 5만의 군사들을 통솔하게 하니 동아(東阿)에서 싸워 동진의 군대가 패배하였다. 그러자 새북(塞北)의 7국인 하란(賀蘭), 섭륵(涉勒)등이 모두 항복하여 북방이 거의 평정되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군사적 공격에서 전연은 매우 안정된 상황을 맞이했고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해 현현리(顯賢里)에 소학(小學)을 세워 제후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황자인 모용홍(慕容泓)을 제북왕(濟北王), 모용충(慕容沖)을 중산왕(中山王)으로 봉하면서 외부에서 공격하는 5호와 동진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그리고 학문을 강연하는 도중 포지(蒲池)에서 다른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주흥이 오르자 시(詩)를 읊으며 경전과 역사에 관하여 담론하였다. 전연은 요동과 요서, 산동성, 하북성, 산서성 북부 지역을 장악하여 제국으로 성장하였고 동진이 남방에서 문화적인 부분을 발전시켰다면 전연은 북방에서 선비 = 한족이 섞인 독특한 문화를 창안했다. 그리고 이러한 북방문화는 북위가 건국되자 모두 흡수되었고 북위는 전연과는 다른 색체의 문화를 종교적인 부분을 강화시킴으로써 화북문화(華北文化)의 시초가 되었다.


360년에 모용준(慕容儁)이 죽으니 당시 나이는 42세였고 11년 간 재위하였다. 뒤를 이은 모용위가 시호를 내려 경소황제(景昭皇帝)라 하고 묘호(廟號)는 열조(烈祖), 묘호(墓號)는 용릉(龍陵)이라 하여 장사지냈다. 전연은 모용준이 죽고 나서 몇 년 뒤 모용각 마저 죽자 급격히 쇠퇴하였다. 모용황, 모용준이라는 강력한 통치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모용위가 정치적인 구심점이 되기에는 모용황, 모용준, 모용각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이러한 가운데 전연에 압제되어 있던 다른 북방민족들이 다시 전연에 도전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은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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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이 다스리고 모용준이 다스리던 하북성 창려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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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진충도, 전연 모용준이 저족의 부견이 강성해지자 이를 공략하기 위하여 산서성 알대의 주요 지역들을 직접 탐방하였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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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창려시 노룡현 갈석산의 모습

 
 
TOTAL 170
65. 백제 개로왕, 북위 효문제에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472년 백제에서 사절들이 북위에 들어와 국교(國交)를 요청하고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대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으로 말미암아 응할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11
64. 풍태후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 장수왕과의 관계
을불혼을 축출한 풍태후는 4년간 대리통치 하였다. 466년 풍태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왕실의 공주와 헌문제와의 정략결혼을 제의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수태왕은 이에 대해 “공주가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장녀와 혼인을 성사하도록 하겠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북위의 풍태후는 이를 인정하여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97
63. 풍태후의 대리 통치에 이은 북위의 전성기 확립
즉위 후에는 백성들이 영토를 개간하여 살 수 있도록 몇몇 황무지에 백성들을 이동시켰고 산지도 개간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또 국내의 구심력을 높이는 의미로부터도 불교 탄압을 폐지했다. 그리고 승려인 사문(沙門)의 담요(曇曜)에게 명하여 운강석굴(雲崗石窟)*을 축조하게 하였다.* 정치는 유학적인 부분을 많이 인용하였…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2. 북위 태무제, 화북을 통일하고 권신 최호와 종애가 북위 권력의 정…
북위 태무제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북량의 저거목건(沮渠牧犍)에게 큰 도움을 얻자, 태무제는 그의 여동생을 후궁 중 하나인 우소의로 맞이했고 자신의 여동생을 저거목건이 왕후로 맞이하도록 했다. 그런데 439년 왕후 탁발씨가 저거목건과 통정하던 저거목건의 형수 이씨에 의해 독살되어 태무제가 이씨를 사사(賜死)토록 요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27
61. 북위 태무제의 정복 전쟁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宋)나라와 자주 전쟁하여 하남성(河南省)을 함락했다. 그리고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 보게 되자 고구려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양국은 사신이 서로 왕래했고 상인들은 고구려와 북위의 영토에서 주로 교역하여 양국의 문물이 서로의 국가에 전파되었다.* * 명원제 시기에는 사신이 왕래한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6  |  Hit: 409
60. 탁발규의 평성(平城) 천도와 북위 개국 공신들을 숙청하다.
398년 탁발규는 황제에 즉위하고 수도를 평성으로 정함으로써 북위를 연 개국황제가 되었다.평성에 수도를 옮기자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이동시켰다. 탁발규는 각 출신과 국가, 민족등을 따지지 않고 명족(名族) 인재들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79
59. 탁발규, 북위(北魏)를 건국하고 전진(前秦)에게서 독립하다.
탁발규는 387년 국호를 대(代)에서 위(魏)로 바꾸고 연호를 등국(登國)으로 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성락으로 정하여 옛 대나라의 초기의 왕정을 복고시켰다. 유현은 이에 분개하고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이용했다. 이것은 탁발규의 숙부인 굴돌(掘突)을 내세워 탁발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동시에 독고부의 군대를 동원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67
58. 전진의 부견이 탁발선비를 복속시키고 동진(東晉)과의 비수대전에…
북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 북위 시조 탁발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발규는 대나라 왕족이자 전체적인 탁발선비의 중원 정착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군주이기 때문이다. 북위의 대표적 군주로 도무제(道武帝-탁발규)와 효문제(孝文帝)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도무제의 시작이 선비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98
57. 흉노 철불부와 대나라의 대립
318년에는 흉노 철불부 유호의 침입을 격퇴하고 서쪽의 옛 오손국의 고토를 취하였다. 동쪽으로는 물길(勿吉)을 병합하고 상당히 넓은 국토를 영유하게 되자 마침 모용선비가 북상해 와서 모용선비와 내몽골 지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후 모용선비와 전쟁의 결과와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고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45
56. 탁발선비의 대(代)나라 건국과 탁발의로의 관제 도입
탁발씨 선비는 위나라 때부터 흉노의 일족들을 몰아내고 조조와 화친과 교역으로 인해 중원 접경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비능 이후에는 단 선비의 세력 하에 있었다. 그것은 전체적인 선비의 균형이 단 선비에 맞춰 있었고 탁발선비가 생활하던 지역은 오환의 범위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오환의 답돈이 위나라에 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52
55. 탁발선비가 통치할 시기의 중기 선비족의 문화와 사회제도
탁발선비의 북위부터 시작되는 남북조 시기, 북위 문화를 중기 선비의 문화로 흔히 규정되며 해당 문화는 선비가 완전히 중원에 정착하면서 유목민족이었던 부분을 버리고 농경 정주문화에 동화되었다. 이것에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귀족 문화의 발달이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불교 문화가 융성했는데 특히 북위의 운강석굴(雲崗石窟)…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539
54. 탁발선비의 연구 개관
탁발선비는 모용선비와 더불어 한민족과 관계 뚜렷한 선비의 씨족이다. 그리고 중원의 5호 16국의 시대를 종식하고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남조의 송나라와 대치하여 남북조 시대를 이끌었던 국가인 북위(北魏)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모용선비가 한창 강성할 때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晋)의 관작을 받고 대(代)나라의 왕으로 봉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35
53. 북연 이후, 모용선비의 향방과 탕가스 족
내전으로 인해 북연은 북위의 압박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풍홍은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고구려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436년 북위가 침공하여 백랑성(白狼城)이 함락되고 수도인 용성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풍홍은 고구려의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망명을 요…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365
52. 북연을 세운 모용운과 풍발
모용운은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성을 본래의 성인 고(高)로 고치고 국호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연호를 정시(正始)라 하고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거사를 주도한 풍발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그대로 대연(大燕)이라 하였다. 모용운은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었을 때, 무관으로서 모용보를 섬겼다. 모용…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422
51. 광개토태왕의 서방 원정과 후연의 멸망
401년 용성 내부에서 모반 사건이 벌어졌고 이 때 모용성은 모반을 피하여 도주하다 살해되었다.이 때 모반 사건은 황제인 모용성의 죽음이 있었으나 그의 일족들에 의해 평정되었다. 모용성의 황후 정씨(丁氏)가 차기 황위 자리로 모용희(慕容熙)를 추천했는데 모용희는 모용수(慕容垂)의 서장자였고 고구려 원정에 선봉으로 출정하여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5  |  Hit: 1123
50. 후연의 내부 분열과 쇠락
모용수의 뒤를 이어 모용보(慕容寶)가 황제가 되었다. 모용보는 태자 시절부터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문약하여 난세의 군주감이 아니라고 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자 지위를 위협받기도 했다. 이러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395년에 군사를 이끌고 북위(北魏)를 공격하 였으나 참합피(參合陂)에서 탁발규(拓拔珪)에게 대패하였다.황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615
49.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후연의 모용수의 격돌, 후연이 북위(北魏)에게…
하북성 일대의 혼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모용수는 고구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하북 지역 평정과 동진의 세력을 막는 것도 급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고국양왕(故國壤王)은 이러한 모용수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부친인 고국원왕 시기의 치욕은 잊을 수 없는 부분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5-24  |  Hit: 849
48. 전진(前秦)의 패망과 모용수의 등장 및 후연(後燕)의 건국
383년, 전진의 부견은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 때 강족의 장수 요장이 선봉을 맡고 전연의 황족이자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인 모용수가 후위를 맡았다. 보병 60만, 기병 27만의 대군에 서역으로 원정간 10만까지 포함하면 10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부견의 본군이 형주와 예주로 진격하고, 촉과 한중의 군사는 각기 장강과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7. 동진(東晉) 환온의 북벌과 전연, 전진(前秦)의 부견에게 멸망하다.
전진의 부견은 전연을 도모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내부 상황을 판단하였는데 전연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있음을 알고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진의 경우, 중원의 책사인 왕맹(王猛)을 영입하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내부 치세를 확장했다. 10여 년 동안 내치를 다졌던 전진은 강력해진 세력을 이끌고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 정복전쟁에 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57
46. 모용각의 통치 시대
360년대의 중원은 천하 분란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정족지세(鼎足之勢)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시기,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배분함으로써 세워진 봉건제도의 최대 악순환의 결과였다. 이 때부터 중원은 춘추전국시대, 진, 한 군웅할거 시대, 삼국의 성립 직전 군웅할거 시대, 이후 5호 16국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38
45. 모용준과 전진(前秦)의 부견과 격돌
356년 모용준의 태자(太子) 모용엽(慕容曄)이 죽자 시호를 내려 헌회(獻懷)태자라고 하였다. 357년에 셋째 황자인 모용위(慕容暐)를 태자로 삼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개정하여 광수(光壽)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용준은 동생인 모용수(慕容垂)와 중군장군(中軍將軍) 모용건(慕容虔)을 보내 호군장군(護軍將軍) 평희(平熙)…
Name: 정길선  |  Date: 2017-05-23  |  Hit: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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