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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북주 무제의 북제 정복과 수국공 양견의 등장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6-01     조회 : 445  

북주를 멸망시킨 이후 무제는 북제와 동맹국인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념했다.* 온달 장군이 등장하여 북주를 격퇴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고 577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평원태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임명했다.* 577년에 평원태왕이 사신을 보내와 통교와 교역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평원태왕을 다시 상개부의동대장군 요동군개국공 요동왕(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開國公遼東王)의 지위를 주었다.* 이후 북주와의 교역이 없었던 것은 고구려와 북주는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4년 뒤... 581년에 북주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四十五,「溫達列傳」, 第五 [본문]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 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十九,「高句麗國本紀」, 第七, <平原王> [본문] 十九年, 王遣使入周朝貢, 周高祖拜王爲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高麗傳> [본문] 璉五世孫成,大統十二年,遣使獻其方物。成死,子湯立。建德六年,湯又遣使來貢。高祖拜湯為上開府,儀同大將軍, 遼東郡開國公, 遼東王.

북제는 북주에게 잔여 일족마저 토벌된 뒤 578년에 북주가 화북 지방을 완전히 통일함으로써 북위에 이어 두 번째로 선비족 소속 국가로 화북을 통일한 국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어 남조의 진나라를 공격하여 중원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를 공격하는 준비 중에 갑자기 병사했고 진나라에 대한 공격은 일시에 모두 중단되었다.

* 『북제서(北齊書)』, 卷 十二,「補列傳」, 第四 , <文宣四王> [본문] 周將宇文神舉軍逼馬邑,紹義遣杜明達拒之,兵大敗。紹義曰:「有死而已,不能降人。」遂奔突厥。衆三千家,令之曰:「欲還者任意。」於是哭拜別者太半。突厥他缽可汗謂文宣為英雄天子,以紹義重踝似之,甚見愛重,凡齊人在北者,悉隸紹義。

무제가 죽자 아들인 우문윤(宇文贇)이 황제가 되었다. 후에 선제(宣帝)로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본 단락에서는 선제(宣帝)로 서술하기로 한다. 선제는 주위로부터 자질이 의문시되고 있을 정도로 황제로서의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아 성장했다. 그러한 교육 중에는 지팡이로 격렬하게 구타하는 등 여러 가혹한 교육이 있었다. 그래서 부친이 요절했을 때에 지팡이의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그 죽음이 너무 늦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주서(周書)』, 卷七,「帝紀」, 第七, <宣帝> [본문] 他是個暴虐荒淫的, 皇帝。宇文贇即位前,父親武帝對他管教極為嚴格,曾派人監視他的言行舉止,甚至只要犯錯就會嚴厲懲罰。建德二年,迎娶隋國公楊堅的, 長女楊麗華。

즉위 후 우선 착수한 것이, 황실과 군부의 중진으로 북제 공략의 공적자인 제왕 헌(齊王憲)을 참수했다. 무제 시대의 옛 신하를 숙청하고, 대규모 궁전을 축조 하는 등 사치를 다했고 온갖 포악무도한 짓을 자행했기 때문에, 크게 인망을 잃는 등 군주로서의 실정을 자행했다. 579년, 7세의 아들 우문연(宇文衍)에 양위. 스스로는 천원황제(天元皇帝)로 자칭해, 천원황후(天元皇帝, 양황후), 천황후(天皇后), 천우황후(天右皇后), 천좌황후(天左皇后), 천중대황후(天中大皇后)의 5명을 맞아들이고, 주색에 매달렸다. 그리고 정치에 전반적인 부분은 황후의 부친인 수국공(隨國公) 양견(楊堅)에게 위임하고 황제인 우문연을 보필하도록 주문했다. 그리고 580년에 선제는 사망하였다.

579년 7세의 우문연이 황제가 되었고 훗날 시호를 정제(靜帝)라 하였기 때문에 본 단락에서는 정제(靜帝)로 서술하기로 한다. 선제가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했기 때문에, 정제는 정양궁(正陽宮)을 칭했다.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양황후의 아버지인 승상 · 수국공 양견(楊堅)이 보필했다. 즉위 후 이름을 천(闡)으로 개명했다.* 선제가 죽자 양견은 외척이라는 명목으로 섭정이 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실권이 사라지게 되었다.

* 『주서(周書)』, 卷八, 「帝紀」, 第八, <靜帝> [본문] 靜皇帝諱衍,後改爲闡,宣帝長子也.

선제 시대부터 북주의 국력은 급속도로 약화된 상태였고 반대로 외척의 권력이 상당히 강했던 시기로 보여 진다. 그리고 신주자사(申州刺史) 이혜(李慧)와 황족 소국공(邵國公) 우문주(宇文冑) 등이 반란을 일으켜 상황이 악화되자 이를 수습 할 수 없는 정제는 양견에게 이를 토벌하도록 명하자 출정하여 이를 토벌했다. 정제는 더 이상 황제의 지위를 영위할 수 없는 상태로 581년 2월에 수왕(隋王)양견에게 제위를 선양하였다.* 이로써 북주는 멸망하고 멸망하였고 퇴위 후의 정제는 개국공(介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3개월 후 양견에게 살해되고 정제의 일족들이 모두 주살되었다. 이에 양견은 우문씨 황족에 대한 숙청 작업을 벌여 대부분의 우문씨의 황족들이 살해되고 북주 황실의 맥이 여기에서 단절되었다.*

* 『주서(周書)』, 卷八, 「帝紀」, 第八, <靜帝> [본문] 大定元年 二月甲子,隨王楊堅稱尊號,帝遜于別宮.

* 『수서(隋書)』, 卷一,「帝紀」上, 第一. <文帝> [본문] 開皇元年二月甲子,上自相府常服入宮,備禮即皇帝位於臨光殿。設壇於南郊,遣使柴燎告天.

* 『자치통감(資治通鑑)』 [본문] 隋主潜害周静帝而为之举哀,葬于恭陵;以其族人洛为嗣。

이후 북주의 황실은 숙청되어 맥이 단절되었으나 기존의 우문선비의 세력은 양견에게 협조하여 수나라를 세우는데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우문선비의 세력들은 수 양제(煬帝) 때 그의 폭정에 항거하여 대부분 양제를 배신하여 당나라 이연(李淵)에게 의탁했고 이연이 당(唐)을 개국하면서 개국 공신들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당나라 멸망 때 까지 우문선비는 살아남았고 이후 거란이 화북에 침공하자 동족인 거란에 협조하여 거란의 황족이 되었다.

우문선비는 북주 시대에 고구려와 큰 연관은 없었으나 호한의 정책에 맞서 본연 선비의 문화를 찾으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것은 비록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의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24년의 짧은 기간을 영위했던 국가로 잠시나마 선비 본연의 정치 체계와 군사 체계를 확립하였다는 것은 한족 문화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에 대한 충분한 반박과 그에 상응하는 근거가 된다. 수, 당의 구성원을 이루고 거란의 요나라에서도 같은 본연의 문화를 표방하였다. 스스로의 자주성을 지켰던 우문선비는 현대의 중국에서 소수민족 축소 정책에 의하여 소멸되었지만 해당 시기에 펼쳤던 자주성은 그대로 문헌사료들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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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70
86. 당나라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근거
이연 집안이 한족 조상을 가졌다 해도, 탁발선비가 화북을 통일한 439년 이후부터 선비어를 말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이연이 당 나라를 세운 618년에는 이미 179년 가까이 선비어를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북주는 고사하고 한족 국가로 간주해도 된다고 흔히 말하는 북제 조정의 언어 역시 선비어였다. 그리고 북주가 한화정책을 거부하고 …
Name: 정길선  |  Date: 2017-06-02  |  Hit: 840
85. 당나라 고조 이연은 서량 황실 후손이자 선비족의 후예이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의 자식으로 먼저 이연의 가계와 당나라를 건국한 과정, 그리고 이연의 선조들이 어떠한 인물들이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나라가 선비족 계통의 국가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연의 7대조는 이고(李暠)*로 흉노 부족이 오늘날 감숙성 지역…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657
84. 수 문제의 탄생설화와 문제의 가계에 대하여
개국 황제의 출생에는 대부분 설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수나라 문제 양견 역시 탄생설화가 존재했고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갑자기 반야사의 정원이 양견이 출생할 무렵 보랏빛으로 밝게 빛났다. 비구니가 이르기를 "보통 아들이 아니니 소중하게 키워야 한다." 라고 말했다. 양견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양견의 이마에 용의 뿔…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493
83. 수나라 양견은 선비족 출신이고 수나라는 선비족 국가이다.
흔히 수, 당을 한족 국가라 하여 한족 국가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수, 당은 본연의 문화와 한족 문화를 입혀서 혼합문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수, 당이 선비 본연의 색체를 점점 잃어가던 시기에 혈통적으로 선비의 혈통인 것은 수, 당의 시조들에만 해당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나라는 문제 이…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596
82. 북주 무제의 북제 정복과 수국공 양견의 등장
북주를 멸망시킨 이후 무제는 북제와 동맹국인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념했다.* 온달 장군이 등장하여 북주를 격퇴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리고 577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평원태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임명했다.* 577…
Name: 정길선  |  Date: 2017-06-01  |  Hit: 446
81. 북주와 고구려의 외교관계
북주와 고구려간의 외교적 부분의 대외관계에서는 고구려가 먼저 서위 시절인 546년에 외교 및 교역사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서로간의 큰 교류가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는 원래 북제와 영토와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이고, 동위와 북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고환이 고구려계이기 때문이다.* 북주가 세워진 이후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
Name: 정길선  |  Date: 2017-05-31  |  Hit: 486
80. 우문각의 북주와 우문호의 세도정치
북주는 우문각(宇文覺)에 의해 556년에 건국되었다. 북주의 건국과 우문선비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기 전에 우문선비가 어떻게 서위의 영토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지 주목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문태의 출신지는 무천진(武川鎭)(貿泉鎭)으로 현재 내몽골자치구 지역으로 감숙성 이북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당 지역은 과거에 흉…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557
79. 북제 북주의 돌궐과의 관계를 표현한 왜곡된 서술
북주, 북제는 돌궐이 두려워 해마다 막대한 물자를 바치고 돌궐은 그들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막대한 물자를 받아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돌궐과 북주, 북제는 지배와 피지배자 관계인데 돌궐이 북주에 조공하였다고 『주서(周書)』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명제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명제 2년(558년) 사근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505
78. 강력한 돌궐에 북주와 북제가 무릎을 꿇다
유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누릴 무렵, 서쪽에는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연의 관심이 북위 시기 까지는 중원에 쏠려 있었고 중원에 있는 세력들은 유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과 중원 세력들 간의 알력다툼은 매번 유연의 패배로 끝이 났다.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523
77. 초기 거란과 고구려와의 관계
거란은 소수림왕 제위 시기인 378년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8개 부락을 탈취했다.*이것 역시 거란이 생기고 나서 단독으로 이웃을 공격하여 거둔 거란사에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거란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종속국이 되고 말았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82
76. 우문선비와 그 갈래 민족들 (거란, 실위, 해, 습, 지두우, 고막해)와 …
우문선비는 고구려,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 관계로 많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부분에서 모용선비가 고구려, 부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비공식적인 부분에서는 우문선비와 관계가 잦았으며 필요에 따라 이동하고 정주하는 부분이 더욱 강하였다. 여기에서 공식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정식국가와 같이 사신 왕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701
75. 우문선비의 요동, 요서 지역 정착과 모용선비와의 관계
우문선비는 강력한 세력을 일으키던 부족은 아니었으나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에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영위하였으며 주로 목축업을 하였다. 주로 목축업을 하던 지역은 오환의 옛 영토인 적봉과 서랍목륜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은 고구려, 부여와 주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고 때로는 고구려의 보호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52
74. 탁발선비 연구에 대한 마무리와 탁발씨의 한족과 동화에 관하여
서위에 소속되어 있던 탁발선비의 일족은 북주가 건국된 이후 그대로 중원에 남았다. 우문선비가 건국한 북주는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오히려 전 왕조의 황족들인 탁발선비도 관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우문선비는 탁발선비의 과거 용맹성을 매우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무관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탁발선비의 황족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75
73. 탁발선비의 투르크계 변환과 중원 정착, 중앙아시아의 선비계 민족 …
동위와 서위가 멸망한 뒤 동위의 탁발선비 세력들은 북제의 시조 고양에 의해 북쪽 변경인 회삭진(懷朔鎭) · 무천진(武川鎭) · 무명진(撫冥鎭) · 유현진(柔玄鎭) · 옥야진(沃野鎭) · 회황진(懷荒鎭)에 강제 추방되었다. 북제의 고양은 이들 6개 진에게 탁발선비의 황족들과 남은 씨족들을 감시하게 하였는게 앞서 언급한 6개의 진들은 효…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722
72. 북제와 북주의 성립
550년, 후경(後景)이 남조 양(梁)나라에 항복해 동위를 배신하자 고양은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상태로 몰아넣었다. (『양서(梁書)』, 卷七十,「侯景傳」, 第七 [본문] 王僧辯遣侯瑱率軍追景。景至晉陵,劫太守徐永東奔吳郡…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70
71. 북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북제의 고씨 집안은 고구려의 후예이…
6진의 유력자 중에 고조의 일족들이 있었는데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고조의 일족 중에서 다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東魏)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武川鎭) 군벌, 일명 관롱집단(關籠集團)으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569
70. 북위 영태후의 섭정과 6진의 난
선무제의 뒤를 이어 선무제의 차남인 효명제(孝明帝)가 황제가 되었으나 6세에 불과해 영태후(靈太后)가 섭정하게 되었다.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담당하면서 고조와 고조의 일족들을 일부 복권시켰고, 그들 고조의 일족들 중 고환(高歡)이 매우 영명하고 재능이 있어 발해 고씨 일족들은 다시 고환(高歡)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576
69. 고구려계 고조의 북위에 대한 철권통치와 그의 죽음과 몰락
선무제는 외가 인척들에게 매우 극진하여 외삼촌인 고조 형제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고 외조부 고양(高陽)과 외조모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겼고 선무제는 정치보다는 오히려 향락에 심취하여 지냈다. 게다가 불교에 입도하여 점차적으로 불교신앙에 빠지면서 오히려 정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8. 북위, 백제와의 전쟁과 효문제, 문소황후의 죽음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대대적인 한족문화를 받아들이는 작업 시행했다. 이것은 풍태후도 하지 않았던 일로도 일찍이 풍태후의 섭정시기에도 이러한 제안이 들어온 적 있었으나 풍태후는 선비족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효문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위험한 일을 자행…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49
67. 북위 효문제, 백제와 전쟁에서 패배하다.
480년 고구려는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과 통교하기 위하여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북위의 광주(光州)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북위의 궁궐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제와의 동맹에 대한 파기를 요구하여* 장수태왕은 북위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이를 파기하고 북위와 더욱 통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49
66. 북위 황실과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인
476년 고구려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북위와 통교(通交)하면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고조(高肇)가 이와 같은 인물이었다. 고조(高肇)일가는 발해 고씨(撥海高氏)로 대대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던 완벽한 한족일가였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高苦)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고고의 가문은 고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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