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와 고구려간의 외교적 부분의 대외관계에서는 고구려가 먼저 서위 시절인 546년에 외교 및 교역사절을 보냈다. 그리고는 서로간의 큰 교류가 없었다. 그것은 고구려는 원래 북제와 영토와 국경을 마주했기 때문이고, 동위와 북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 고환이 고구려계이기 때문이다.* 북주가 세워진 이후 고구려와 북주의 관계 기록은 『주서(周書)』,「이역열전(異域列傳)」에 있는 <고려전>에서의 기록 세 줄이 전부일 정도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인 북제와 관계를 돈독히 하였기 때문에 북제와 적국인 북주와는 교류를 끊었기 때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친 것이 아닌 교역과 교류의 의미로써 해석해야 한다. 한족의 위한휘치로 인하여 고구려가 북주의 종속국으로 오해 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高麗傳> [본문] 연(璉)의 5세손 성(成: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이 대통(大統) 12년(546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 璉五世孫成,大統十二年,遣使獻其方物。成死,子湯立。
이후 효민제를 살해한 우문호는 우문태의 서장자인 우문육(宇文毓)을 황제로 계승하게 하였다.* 우문육은 후에 명제(明帝)로 시호를 부르기 때문에 본 단락에서도 명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 『주서(周書)』, 卷四,「帝紀」, 第四, <明帝> [본문] 武成元年 秋八月己亥,改天王稱皇帝,追尊文王為帝,大赦改元.
* 명제(明帝)의 아명은 통만돌(統萬突)로 불린다. 이것은 534년, 우문태가 하주의 통만성에 머물었을 때에 출생 했던 것에 유래한다.
명제 역시, 우문호의 권력에 눌리며 당시의 모든 정사는 우문호의 손에서 해결되었다. 그러나 명제는 매우 명민해 식견도 갖추었지만 우문호의 입장에서 보면 명제의 명민함은 오히려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문호는 명제를 독살하고 우문옹(宇文邕)을 황제로 옹립했다. 여기에서 우문옹의 시호가 무제(武帝)이기 때문에 본 단락에서는 무제로 서술하기로 한다. 우문호는 초대 효민제부터 3대 무제까지 세우며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이것은 우문태가 죽으면서 우문호에게 황위 계승에 대한 부분과 황제를 보필하는 것을 부탁하였기 때문이다. (『수서(隋書)』, 卷 五十,「宇文慶列傳」, 第十五. [본문] 元孝矩......河南洛阳人也其后周太祖为兄子晋公护娶孝矩妹为妻......
『주서(周書)』, 卷 二十三,「宇文護列傳」上, 第十五. [본문] 子威嗣。威少有父风,袭爵美阳伯。娶晋公护女新兴公主,拜车骑大将军......
『주서(周書)』, 卷 三十五,「宇文護列傳」下, 第 二十七. [본문] 崔猷字宣猷,博陵安平人......猷深为晋公护所重,护乃养猷第三女为己女,封富平公主。)
우문호는 경쟁국가인 북제를 정복하기 위해 돌궐과 연합하여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문호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제(武帝)가 우문호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572년 출정하는 우문호의 세력을 축출하고 돌궐의 배신으로 돌아오는 우문호 마저 주살했다. 이렇게 우문호와 그의 세력을 축출한 무제는 친정을 개시하고 거대한 권력, 재산, 토지를 소유한 도교와 불교를 탄압해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일반 승려와 도사를 병사로 강제 징병하며 종교에 폐단을 단속하려 하였다. 당시 도교와 불교는 부패함으로 인해 많은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부분을 단속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했다.
첫 번째로는 왕권이 우문호로 인하여 많이 추락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부분이 왕권 강화로써 모든 것은 황제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부분은 기존 북위에서부터 이어오던 한화정책에서 다시 선비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선비의 전통을 회귀하기 위해 왕조의 의례 등을 선비족풍으로 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용어도 한어가 아닌 선비어를 사용했으며 성씨도 원래의 선비족 성씨인 우문씨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행했다. 거기에 영내의 한인들에 대해서도 선비풍의 성씨로 고칠 것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유교, 불교, 도교를 모아 3교의 연구기관으로 통도관(通道關)을 설치해 우수한 승려나 도사를 학사로서 수용하여 폐불과 폐도를 단행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조건으로 정치제도와 군병제에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무제는 유교 경전에 있는『주례(周禮)』에 기초한 관제를 사용하고『주례(周禮)』를 이용하여 군병제에 변화를 모색했다.* 그리하여 대총재(大冢宰), 대사도(大司徒), 대종백(大宗伯), 대사마(大司馬), 대사구(大司寇), 대사공(大司空)의 6관의 관제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한 6관의 관제는 후에 3성 6부라고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 『주례(周禮)』에 따르면, 중국 주(周)나라의 통치조직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것은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동관(冬官)의 육관(六官)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대사구는 추관의 장관으로 형벌과 재판을 맡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이외에도 천관의 장은 총재(冢宰)로 일반 행정을 총괄하고, 지관은 대사도(大司徒)의 책임 아래 민치(民治)와 교육을 담당하고, 춘관은 대종백(大宗伯)의 지휘 아래 예악・제사를 관장하고, 하관은 대사마(大司馬)가 장관으로 군사를 맡으며 동관은 대사공(大司空)이 토목을 관장하였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卷 三十九,「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30년, 5월 14일, 임자(任子) [본문] 又附論時事曰⋯是以明主用人 必先器使, 不然而使蚊負山, 使駒服箱, 則僨事敗政, 理所必至, 向來中批之擢, 或不量才, 若今之大司寇, 素有剛果之稱, 前後莅外, 頗得能聲, 而病在自用, 事不近情…
북주는 군의 요직으로 8주국 - 12대장군을 배치했는데, 이들 20명은 우문태의 출신지인 무천진(武川鎭) 출신자가 많았다. 이들 밑에 24개부를 설치해, 이들 24군단이 부병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군사 제도는 수나라 양씨가 12대장군이었고 당나라 이씨가 8주국의 가문이었던 이유도 있어서 그대로 수나라, 당나라까지 이어가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북주의 불안한 정세를 들 수 있다. 외부적으로 북주는 돌궐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대한 조세 부담은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불교와 도교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각종 재물들을 징수하면서 착취의 폐악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대였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자칫 국가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내부적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다.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 재정을 충당하려면 종교에 대한 탄압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민심을 얻는 것과 동시에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두 가지의 포석을 가지고 있었다.
무제의 과감한 개혁으로 인해 북주는 무제 시기에 이르러서야 국가적인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면서 군사력이 강해져 575년에 마침내 북제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북주군은 청주(靑州)에 이르니 북제의 황제 후주 고위(高緯)가 진(陳)나라로 도주하려고 금 주머니를 안장 뒤에 놓으며, 장란, 숙비 등 십 수명과 더불어 말을 타고 청주 남쪽 등촌(登村)에 이르렀으나 북주 장수 위지강(魏志江)에게 발견되어 포로로 잡히고 재물들은 포획되었다. 그리고 북제의 도성인 업성을 함락시키고 입성했다. 여기서 태후와 함께 북제의 황족들을 사로잡은 뒤 유주(幼主)와 여러 왕들을 모두 장안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황제를 온국공(溫國公)에 책봉하였다.* 이로써 북제는 북주에게 578년 완전히 멸망했다.*
* 『북제서(北齊書)』, 卷八,「帝紀」, 第六 , <幼主> [본문] 隆化二年春正月己丑,周軍奄至青州,太上窘急,將遜於陳,置金囊於鞍後,與長鸞、淑妃等十數騎至青州南鄧村,為周將尉遲綱所獲。送鄴,周武帝與抗賓主禮,並太后、幼主、諸王俱送長安,封帝溫國公.
* 『북제서(北齊書)』, 卷 十二,「補列傳」, 第四 , <文宣四王> [본문] 高寶寧在營州,表上尊號,紹義遂卽皇帝位,稱武平元年。以趙穆為天水王。他缽聞寶寧得平州,亦招諸部,各舉兵南向,云共立范陽王作齊帝,為其報讐。周武帝 大集兵於雲陽,將親北伐,遇疾暴崩。紹義聞之,以為天贊己。盧昌斯據范陽,亦表迎紹義。俄而周將宇文神舉攻滅昌期。其日,紹義適至幽州,聞周總管出兵于外,欲乘虛取薊城,列天子旌旗,登燕昭王冢,乘高望遠,部分兵衆。神舉遣大將軍宇文恩將四千人馳救幽州,半為齊軍所殺。紹義聞范陽城陷,素服舉哀,迴軍入突厥。周人購之於他缽,又使賀若誼往說之。他缽猶不忍,遂偽與紹義獵於南境,使誼執之,流于蜀。紹義妃渤海封孝琬女,自突厥逃歸。紹義在蜀,遺妃書云:「夷狄無信,送吾於此。」竟死蜀中。
북주의 시작점인 북위의 6진 중 하나 무천진 유적
중국 드라마에서 나타난 우문육 북주 명제
북주 무제 우문옹의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