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누릴 무렵, 서쪽에는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연의 관심이 북위 시기 까지는 중원에 쏠려 있었고 중원에 있는 세력들은 유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과 중원 세력들 간의 알력다툼은 매번 유연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러자 중앙아시아 측에서 아사나씨(阿史那氏)가 철륵의 세력 중에 가장 강력하여 유연에 독립을 선포하고 기타 철륵계 제 부족들을 정복해 나갔다.
본래 아사나씨 부족은 철을 주로 다루며 금산(金山)에서 영위하였는데 금산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을 금산이 투구모양처럼 생겼다하여 한문으로 음차한 현상으로 ‘突厥’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치한 족장 이리가한(伊利可汗)은 주변 철륵계 부족에게 공존을 위한 통합을 주장했다. 이를 따른 부족들은 이리가한 밑으로 모여들었고 거부한 부족들은 무력으로 정복해버렸다.
이렇게 돌궐이 성장해 나아갈 때 유연은 이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돌궐은 545년에는 중국의 서위(西魏)와 비단무역을 시작하면서 통교하였고 유연을 전후에서 압박하게 되니 유연은 점차 세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돌궐의 이리가한은 서위로부터 장락공주(長樂公主)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정략결혼으로 인한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552년에는 유연의 가한인 아나양(阿那瓖)을 공격하여 자결하게 하고 유연을 멸망시켰다.* 유연의 민족은 흩어졌고 동쪽에 위치한 일부 민족들은 거란과 실위에 들어갔고 멀리 고구려로도 망명했으며 서쪽에 위치한 민족들은 좀 더 서진하여 우랄산맥 인근지역으로 도주했다.
* 『주서(周書)』, 卷 五十, 「夷曆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突厥者,蓋匈奴之別種,姓阿史那氏。別為部落。後為鄰國所破,盡滅其族。有一兒,年且十歲,兵人見其小,不忍殺之,乃刖其足,棄草澤中。有牝狼以肉飼之,及長,與狼合,遂有孕焉。彼王聞此兒尚在,重遣殺之。使者見狼在側,並欲殺狼。狼遂逃于高昌國之北山。山有洞穴,穴內有平壤茂草,周回數百里,四面俱山。狼匿其中,遂生十男。十男長大,外託妻孕,其後各有一姓,阿史那即一也。子孫蕃育,漸至數百家。經數世,相與出穴,臣於茹茹。居金山之陽,為茹茹鐵工。金山形似兜鍪,其俗謂兜鍪為「突厥」,遂因以為號焉。
* 『북사(北史)』, 卷 九十六, 「돌궐전(突厥傳)」, 第 八十七, [본문] 突厥者,其先居西海之右,獨爲部落,蓋匈奴之別種也。姓阿史那氏。後爲鄰國所破,盡滅其族。有一兒,年且十歲,兵人見其小,不忍殺之,乃刖足斷其臂,棄草澤中。有牝狼以肉餌之,及長,與狼交合,遂有孕焉。彼王聞此兒尚在,重遣殺之。使者見在狼側,並欲殺狼。於時若有神物,投狼於西海之東,落高昌國西北山。山有洞穴,穴內有平壤茂草,周廻數百里,四面俱山。狼匿其中,遂生十男。十男長,外托妻孕,其後各爲一姓,阿史那即其一也,最賢,遂爲君長。故牙門建狼頭纛,示不忘本也。漸至數百家,經數世,有阿賢設者,率部落出於穴中,臣於蠕蠕。至大葉護,種類漸強。當魏之末,有伊利可汗,以兵擊鐵勒,大敗之,降五萬餘家。遂求婚於蠕蠕主。阿那瑰大怒,遣使罵之。伊利斬其使,率眾襲蠕蠕,破之。卒,弟阿逸可汗立,又破蠕蠕。病且卒,舍其子攝圖,立其弟俟叔稱爲木杆可汗。或云突厥本平涼雜胡,姓阿史那氏。魏太武皇帝滅沮渠氏,阿史那以五百家奔蠕蠕。世居金山之陽,爲蠕蠕鐵工。金山形似兜鍪,俗號兜鍪爲突厥,因以爲號。又曰突厥之先,出於索國,在匈奴之北。其部落大人曰阿謗步,兄弟七十人,其一曰伊質泥師都,狼所生也。阿謗步等性並愚癡,國遂被滅。泥師都既別感異氣,能征占風雨。取二妻,云是夏神、冬神之女.
돌궐은 이리하여 유연 대신에 몽골고원에 유목국가인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위와 동위는 각각 북주와 북제로 국호가 바뀌며 화북 지방의 양대 국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서면가한(西面可汗)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유연의 남은 종족들을 축출하였고 서역의 국가들을 점령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돌궐은 실크로드를 장악함으로써 동, 서양을 가로지르는 중계무역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분이 성공하여 막강한 경제력을 확립하였다. 국토가 넓어지자 서면가한은 서방의 가한이 되어 이리가한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았는데 이를 서돌궐이라 하고 이리가한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돌궐을 동돌궐이라 하여 서로 통치를 양분하였다.
2대 과라가한(科羅可汗) 시기에는 동쪽 국경 유연의 잔존 세력과 거란의 세력들을 정복하여 지배하에 두고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했으며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은 서방과 북방의 정령 일족들을 병합하여 옛 흉노의 영토를 모두 수복하였다. 이후 4대 타발가한(打茇可汗) 때는 다시 북제, 북주와 양 국경지대까지 영역을 넓혀 이들을 위협하고 통교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북주에서 통교를 허용하는 한편, 돌궐과 혼인 동맹을 요청하였다. 돌궐의 타발가한은 이를 받아들였고 북제도 같은 시기에 타발가한에 통교와 혼인 동맹을 요청했으나 통교는 받아들이고 혼인 동맹은 유보했다.* 그리고 558년 돌궐은 북제를 공격하여 국경지대를 약탈하고는 포로 수백명을 잡아 돌아갔다.*
* 라시드(Rashid al-Din),『몽고전사(蒙古全史)』, Tahran Ulusal Müzesi, 1300. 154p 참조. [본문] 돌궐의 목가가한(木汗可汗)은 서위(西魏)로 도망한 유연가한(柔然可汗)인 등숙자(鄧叔子)의 주살을 청원했다. 서위(西魏)의 자문태(宇文泰)는 이것을 허락하고 등숙자(鄧叔子)를 청문외(青門外)에서 죽였다. 이리하여 완전히 유연(柔然)을 멸망시킨 돌궐의 목한가한(木汗可汗)은 중국의 북조(北朝)와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인척관계를 이룬다. 처음은 북주(北周)과 북제(北斉)의 양국으로부터 구혼을 받았는데 목가가한(木汗可汗)은 북주(北周)를 택하여 보정3년(保定 3年 : 563)부터 4년(564)까지 북제토벌(北斉討伐)에 참가했다. 이 전쟁에는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후에도 돌궐과 북주(北周)의 관계는 좋았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時與齊人交爭,戎車歲動,故每連結之,以為外援。初,魏恭帝世,俟斤許進女於太祖,契未定而太祖崩。尋而俟斤又以他女許高祖,未及結納,齊人亦遣求婚,俟斤貪其幣厚,將悔之。至是,詔遣涼州刺史楊荐、武伯王慶等往結之。慶等至,諭以信義。俟斤遂絕齊使而定婚焉。仍請舉國東伐。語在荐等傳。
563년, 조서로 수국공(詔隨公) 양충(楊忠)으로 하여금 무리 1만을 이끌고 돌궐과 함께 북제를 정벌하도록 명하였다. 양충의 군대가 형령(衡嶺)을 넘으니 타발가한이 기병 10만을 이끌고 와서 합류하여 출병했다. 564년 정월, 북제의 주력부대를 진양(晉陽)에서 공격하였으나 패했다. 전쟁이 어렵게 되자 돌궐은 군대를 이끌고 제멋대로 후퇴했고 돌아가는 도중에 북제의 국경 근처를 다시 약탈하여 돌궐군만 잇속을 차린 뒤에 돌아갔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突厥甲兵惡,爵賞輕,首領多而無法令,何謂難制馭。正由比者使人妄道其彊盛,欲令國家厚其使者,身往重取其報。朝廷受其虛言,將士望風畏慴。但虜態詐健,而實易與耳。今以臣觀之,前後使人皆可斬也.” ; “돌궐 군대는 질이 나쁘고 작위와 상이 가볍고 수령은 많은데 법령은 없으니 어찌 제어하기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근래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허황되게 그 강성함을 말하는 까닭은 바로 나라에서 그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사신으로 갔을 때 보상을 많이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는 그 거짓말을 듣고 장군과 사졸들도 돌궐의 기세를 바라보고 두려워만 합니다. 그러나 돌궐의 태도가 강건해 보이는 것은 거짓이며 실제로는 다루기 쉽습니다. 지금 신이 보건데 전후의 사신들을 모두 참해야 합니다.”
이 해에 타발가한이 다시 사신을 보내 물건을 바쳐오며, 다시 북제 정벌을 공동 출병을 요청하자 조서로 양충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옥야진(玉野津)을 나가고 진공(晉公) 우문호(宇文趣)에게 낙양으로 진격해 호응하라고 명하였다. 우문호와 연합하여 싸우는데 전황이 매우 불리하자 타발가한이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565년 조서로 진공 우문순(宇文順)대사도 우문귀(宇文貴), 신무공(神武公) 두의(竇毅), 남안공(南安公) 양천(楊荐) 등으로 하여금 가서 타발가한의 딸을 맞이하도록 명했다.
한편 돌궐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는 북제는 여러 차례 강화를 요청한 결과 막대한 재물을 돌궐에 조공하게 되었다. 567년 타발가한이 또 사신을 보내 와서 물건을을 교역했다. 진공 우문순 등이 도착하여 타발가한이 그들을 맞이했는데도 타발가한이 북제와 내통하였다. 북주 조정에서는 화친한 뒤 해마다 명주, 명주 솜, 비단, 무늬 있는 비단 10만 단씩 주었다. 북주의 수도에 머무는 돌궐사람 또한 예로 우대하였는데 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 늘 천 명을 헤아렸다. 그러한 부분에 대한『주서(周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북주 조정에서는 화친한 뒤 해마다 명주, 명주 솜, 비단, 무늬 있는 비단 10만 단씩 주었다. 북주의 서울에 머무는 돌궐사람 또한 예로 우대하였는데 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 늘 천 명을 헤아렸다. 북제 사람들도 그들이 침략해 약탈할 것을 두려워해 나라의 창고를 기울여 공급하였다. 타발가한은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단지 내가 남쪽에 있는 두 아이를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俟斤死,弟他鉢可汗立。自俟斤以來,其國富彊,有凌轢中夏志。朝廷既與和親,歲給繒絮錦綵十萬段。突厥在京師者,又待以優禮,衣錦食肉者,常以千數。齊人懼其寇掠,亦傾府藏以給之。他鉢彌復驕傲,至乃率其徒屬曰:「但使我在南兩箇兒孝順,何憂無物邪。」 建德二年,他鉢遣使獻馬。)
위 사료를 검토해보면 북주와 북제는 돌궐에게 굴복하여 북주는 해마다 명주, 명주 솜, 비단, 무늬 있는 비단 10만 단씩 바치고 북주의 수도에는 돌궐 사람이 늘 천 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는 것이 전제이다.* 북제 역시 돌궐이 침략해 약탈할 것을 두려워해 나라의 창고를 기울여 바쳤다는 것도 위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한 안정된 환경적 요소 때문에 타발가한은 북주, 북제를 복속하여 물자걱정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대등한 국가간의외교관계가 아닌 돌궐과 북주, 북제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볼 수 있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三年,詔隨公楊忠率眾一萬,與突厥伐齊。忠軍度陘嶺,俟斤率騎十萬來會。明年正月,攻齊主於晉陽,不尅。俟斤遂縱兵大掠而還。忠言於高祖曰:「突厥甲兵惡,爵賞輕,首領多而無法令,何謂難制馭。正由比者使人妄道其彊盛,欲令國家厚其使者,身往重取其報。朝廷受其虛言,將士望風畏慴。但虜態詐健,而實易與耳。今以臣觀之,前後使人皆可斬也。」高祖不納。是歲,俟斤復遣使來獻,更請東伐。詔楊忠率兵出沃野,晉公護趣洛陽以應之。會護戰不利,俟斤引還。五年,詔陳公純、大司徒宇文貴、神武公竇毅、南安公楊荐等往逆女。天和二年,俟斤又遣使來獻。陳公純等至,俟斤復貳於齊。會有風雷變,乃許純等以后歸。語在皇后傳。四年,俟斤又遣使獻馬。
잿빛늑대의 후예 돌궐, 우리와 형제국이다.
돌궐 제국의 최대 영토
돌궐의 깃발, 늑대의 후예답게 늑대가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