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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gs.jpg  정길선  북방유라시아 유목사 산책
 
  강력한 돌궐에 북주와 북제가 무릎을 꿇다
  
   작성자 : 정길선
작성일 : 2017-05-30     조회 : 522  

유연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창 전성기를 누릴 무렵, 서쪽에는 유연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계 부족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간 유연의 관심이 북위 시기 까지는 중원에 쏠려 있었고 중원에 있는 세력들은 유연에 대한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과 중원 세력들 간의 알력다툼은 매번 유연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러자 중앙아시아 측에서 아사나씨(阿史那氏)가 철륵의 세력 중에 가장 강력하여 유연에 독립을 선포하고 기타 철륵계 제 부족들을 정복해 나갔다.


본래 아사나씨 부족은 철을 주로 다루며 금산(金山)에서 영위하였는데 금산에서 살고 있는 종족들을 금산이 투구모양처럼 생겼다하여 한문으로 음차한 현상으로 ‘突厥’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치한 족장 이리가한(伊利可汗)은 주변 철륵계 부족에게 공존을 위한 통합을 주장했다. 이를 따른 부족들은 이리가한 밑으로 모여들었고 거부한 부족들은 무력으로 정복해버렸다.


이렇게 돌궐이 성장해 나아갈 때 유연은 이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돌궐은 545년에는 중국의 서위(西魏)와 비단무역을 시작하면서 통교하였고 유연을 전후에서 압박하게 되니 유연은 점차 세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돌궐의 이리가한은 서위로부터 장락공주(長樂公主)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정략결혼으로 인한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552년에는 유연의 가한인 아나양(阿那瓖)을 공격하여 자결하게 하고 유연을 멸망시켰다.* 유연의 민족은 흩어졌고 동쪽에 위치한 일부 민족들은 거란과 실위에 들어갔고 멀리 고구려로도 망명했으며 서쪽에 위치한 민족들은 좀 더 서진하여 우랄산맥 인근지역으로 도주했다.


* 『주서(周書)』, 卷 五十, 「夷曆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突厥者,蓋匈奴之別種,姓阿史那氏。別為部落。後為鄰國所破,盡滅其族。有一兒,年且十歲,兵人見其小,不忍殺之,乃刖其足,棄草澤中。有牝狼以肉飼之,及長,與狼合,遂有孕焉。彼王聞此兒尚在,重遣殺之。使者見狼在側,並欲殺狼。狼遂逃于高昌國之北山。山有洞穴,穴內有平壤茂草,周回數百里,四面俱山。狼匿其中,遂生十男。十男長大,外託妻孕,其後各有一姓,阿史那即一也。子孫蕃育,漸至數百家。經數世,相與出穴,臣於茹茹。居金山之陽,為茹茹鐵工。金山形似兜鍪,其俗謂兜鍪為「突厥」,遂因以為號焉。


* 『북사(北史)』, 卷 九十六, 「돌궐전(突厥傳)」, 第 八十七, [본문] 突厥者,其先居西海之右,獨爲部落,蓋匈奴之別種也。姓阿史那氏。後爲鄰國所破,盡滅其族。有一兒,年且十歲,兵人見其小,不忍殺之,乃刖足斷其臂,棄草澤中。有牝狼以肉餌之,及長,與狼交合,遂有孕焉。彼王聞此兒尚在,重遣殺之。使者見在狼側,並欲殺狼。於時若有神物,投狼於西海之東,落高昌國西北山。山有洞穴,穴內有平壤茂草,周廻數百里,四面俱山。狼匿其中,遂生十男。十男長,外托妻孕,其後各爲一姓,阿史那即其一也,最賢,遂爲君長。故牙門建狼頭纛,示不忘本也。漸至數百家,經數世,有阿賢設者,率部落出於穴中,臣於蠕蠕。至大葉護,種類漸強。當魏之末,有伊利可汗,以兵擊鐵勒,大敗之,降五萬餘家。遂求婚於蠕蠕主。阿那瑰大怒,遣使罵之。伊利斬其使,率眾襲蠕蠕,破之。卒,弟阿逸可汗立,又破蠕蠕。病且卒,舍其子攝圖,立其弟俟叔稱爲木杆可汗。或云突厥本平涼雜胡,姓阿史那氏。魏太武皇帝滅沮渠氏,阿史那以五百家奔蠕蠕。世居金山之陽,爲蠕蠕鐵工。金山形似兜鍪,俗號兜鍪爲突厥,因以爲號。又曰突厥之先,出於索國,在匈奴之北。其部落大人曰阿謗步,兄弟七十人,其一曰伊質泥師都,狼所生也。阿謗步等性並愚癡,國遂被滅。泥師都既別感異氣,能征占風雨。取二妻,云是夏神、冬神之女.


돌궐은 이리하여 유연 대신에 몽골고원에 유목국가인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위와 동위는 각각 북주와 북제로 국호가 바뀌며 화북 지방의 양대 국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서면가한(西面可汗)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유연의 남은 종족들을 축출하였고 서역의 국가들을 점령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돌궐은 실크로드를 장악함으로써 동, 서양을 가로지르는 중계무역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러한 부분이 성공하여 막강한 경제력을 확립하였다. 국토가 넓어지자 서면가한은 서방의 가한이 되어 이리가한으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았는데 이를 서돌궐이라 하고 이리가한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돌궐을 동돌궐이라 하여 서로 통치를 양분하였다.


2대 과라가한(科羅可汗) 시기에는 동쪽 국경 유연의 잔존 세력과 거란의 세력들을 정복하여 지배하에 두고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했으며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은 서방과 북방의 정령 일족들을 병합하여 옛 흉노의 영토를 모두 수복하였다. 이후 4대 타발가한(打茇可汗) 때는 다시 북제, 북주와 양 국경지대까지 영역을 넓혀 이들을 위협하고 통교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북주에서 통교를 허용하는 한편, 돌궐과 혼인 동맹을 요청하였다. 돌궐의 타발가한은 이를 받아들였고 북제도 같은 시기에 타발가한에 통교와 혼인 동맹을 요청했으나 통교는 받아들이고 혼인 동맹은 유보했다.* 그리고 558년 돌궐은 북제를 공격하여 국경지대를 약탈하고는 포로 수백명을 잡아 돌아갔다.*


* 라시드(Rashid al-Din),『몽고전사(蒙古全史)』, Tahran Ulusal Müzesi, 1300. 154p 참조. [본문] 돌궐의 목가가한(木汗可汗)은 서위(西魏)로 도망한 유연가한(柔然可汗)인 등숙자(鄧叔子)의 주살을 청원했다. 서위(西魏)의 자문태(宇文泰)는 이것을 허락하고 등숙자(鄧叔子)를 청문외(青門外)에서 죽였다. 이리하여 완전히 유연(柔然)을 멸망시킨 돌궐의 목한가한(木汗可汗)은 중국의 북조(北朝)와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인척관계를 이룬다. 처음은 북주(北周)과 북제(北斉)의 양국으로부터 구혼을 받았는데 목가가한(木汗可汗)은 북주(北周)를 택하여 보정3년(保定 3年 : 563)부터 4년(564)까지 북제토벌(北斉討伐)에 참가했다. 이 전쟁에는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후에도 돌궐과 북주(北周)의 관계는 좋았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時與齊人交爭,戎車歲動,故每連結之,以為外援。初,魏恭帝世,俟斤許進女於太祖,契未定而太祖崩。尋而俟斤又以他女許高祖,未及結納,齊人亦遣求婚,俟斤貪其幣厚,將悔之。至是,詔遣涼州刺史楊荐、武伯王慶等往結之。慶等至,諭以信義。俟斤遂絕齊使而定婚焉。仍請舉國東伐。語在荐等傳。


563년, 조서로 수국공(詔隨公) 양충(楊忠)으로 하여금 무리 1만을 이끌고 돌궐과 함께 북제를 정벌하도록 명하였다. 양충의 군대가 형령(衡嶺)을 넘으니 타발가한이 기병 10만을 이끌고 와서 합류하여 출병했다. 564년 정월, 북제의 주력부대를 진양(晉陽)에서 공격하였으나 패했다. 전쟁이 어렵게 되자 돌궐은 군대를 이끌고 제멋대로 후퇴했고 돌아가는 도중에 북제의 국경 근처를 다시 약탈하여 돌궐군만 잇속을 차린 뒤에 돌아갔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突厥甲兵惡,爵賞輕,首領多而無法令,何謂難制馭。正由比者使人妄道其彊盛,欲令國家厚其使者,身往重取其報。朝廷受其虛言,將士望風畏慴。但虜態詐健,而實易與耳。今以臣觀之,前後使人皆可斬也.” ; “돌궐 군대는 질이 나쁘고 작위와 상이 가볍고 수령은 많은데 법령은 없으니 어찌 제어하기 어렵다고 하겠습니까? 근래 사신으로 간 사람들이 허황되게 그 강성함을 말하는 까닭은 바로 나라에서 그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사신으로 갔을 때 보상을 많이 받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는 그 거짓말을 듣고 장군과 사졸들도 돌궐의 기세를 바라보고 두려워만 합니다. 그러나 돌궐의 태도가 강건해 보이는 것은 거짓이며 실제로는 다루기 쉽습니다. 지금 신이 보건데 전후의 사신들을 모두 참해야 합니다.”


이 해에 타발가한이 다시 사신을 보내 물건을 바쳐오며, 다시 북제 정벌을 공동 출병을 요청하자 조서로 양충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옥야진(玉野津)을 나가고 진공(晉公) 우문호(宇文趣)에게 낙양으로 진격해 호응하라고 명하였다. 우문호와 연합하여 싸우는데 전황이 매우 불리하자 타발가한이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565년 조서로 진공 우문순(宇文順)대사도 우문귀(宇文貴), 신무공(神武公) 두의(竇毅), 남안공(南安公) 양천(楊荐) 등으로 하여금 가서 타발가한의 딸을 맞이하도록 명했다.


한편 돌궐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는 북제는 여러 차례 강화를 요청한 결과 막대한 재물을 돌궐에 조공하게 되었다. 567년 타발가한이 또 사신을 보내 와서 물건을을 교역했다. 진공 우문순 등이 도착하여 타발가한이 그들을 맞이했는데도 타발가한이 북제와 내통하였다. 북주 조정에서는 화친한 뒤 해마다 명주, 명주 솜, 비단, 무늬 있는 비단 10만 단씩 주었다. 북주의 수도에 머무는 돌궐사람 또한 예로 우대하였는데 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 늘 천 명을 헤아렸다. 그러한 부분에 대한『주서(周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북주 조정에서는 화친한 뒤 해마다 명주, 명주 솜, 비단, 무늬 있는 비단 10만 단씩 주었다. 북주의 서울에 머무는 돌궐사람 또한 예로 우대하였는데 비단 옷을 입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 늘 천 명을 헤아렸다. 북제 사람들도 그들이 침략해 약탈할 것을 두려워해 나라의 창고를 기울여 공급하였다. 타발가한은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그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단지 내가 남쪽에 있는 두 아이를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俟斤死,弟他鉢可汗立。自俟斤以來,其國富彊,有凌轢中夏志。朝廷既與和親,歲給繒絮錦綵十萬段。突厥在京師者,又待以優禮,衣錦食肉者,常以千數。齊人懼其寇掠,亦傾府藏以給之。他鉢彌復驕傲,至乃率其徒屬曰:「但使我在南兩箇兒孝順,何憂無物邪。」 建德二年,他鉢遣使獻馬。)


위 사료를 검토해보면 북주와 북제는 돌궐에게 굴복하여 북주는 해마다 명주, 명주 솜, 비단, 무늬 있는 비단 10만 단씩 바치고 북주의 수도에는 돌궐 사람이 늘 천 명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는 것이 전제이다.* 북제 역시 돌궐이 침략해 약탈할 것을 두려워해 나라의 창고를 기울여 바쳤다는 것도 위 사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한 안정된 환경적 요소 때문에 타발가한은 북주, 북제를 복속하여 물자걱정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대등한 국가간의외교관계가 아닌 돌궐과 북주, 북제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볼 수 있다.


* 『주서(周書)』, 卷 五十, 「異域列傳」下, 第 五, <突厥傳> [본문] 三年,詔隨公楊忠率眾一萬,與突厥伐齊。忠軍度陘嶺,俟斤率騎十萬來會。明年正月,攻齊主於晉陽,不尅。俟斤遂縱兵大掠而還。忠言於高祖曰:「突厥甲兵惡,爵賞輕,首領多而無法令,何謂難制馭。正由比者使人妄道其彊盛,欲令國家厚其使者,身往重取其報。朝廷受其虛言,將士望風畏慴。但虜態詐健,而實易與耳。今以臣觀之,前後使人皆可斬也。」高祖不納。是歲,俟斤復遣使來獻,更請東伐。詔楊忠率兵出沃野,晉公護趣洛陽以應之。會護戰不利,俟斤引還。五年,詔陳公純、大司徒宇文貴、神武公竇毅、南安公楊荐等往逆女。天和二年,俟斤又遣使來獻。陳公純等至,俟斤復貳於齊。會有風雷變,乃許純等以后歸。語在皇后傳。四年,俟斤又遣使獻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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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늑대의 후예 돌궐, 우리와 형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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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국의 최대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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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궐의 깃발, 늑대의 후예답게 늑대가 그려져 있다.

 

 
 
TOTAL 170
86. 당나라 고조 이연, 태종 이세민이 선비족 출신이라는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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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481
76. 우문선비와 그 갈래 민족들 (거란, 실위, 해, 습, 지두우, 고막해)와 …
우문선비는 고구려, 부여와 국경을 마주한 관계로 많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부분에서 모용선비가 고구려, 부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비공식적인 부분에서는 우문선비와 관계가 잦았으며 필요에 따라 이동하고 정주하는 부분이 더욱 강하였다. 여기에서 공식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정식국가와 같이 사신 왕래 …
Name: 정길선  |  Date: 2017-05-30  |  Hit: 701
75. 우문선비의 요동, 요서 지역 정착과 모용선비와의 관계
우문선비는 강력한 세력을 일으키던 부족은 아니었으나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에는 주로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영위하였으며 주로 목축업을 하였다. 주로 목축업을 하던 지역은 오환의 옛 영토인 적봉과 서랍목륜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은 고구려, 부여와 주로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었고 때로는 고구려의 보호를…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52
74. 탁발선비 연구에 대한 마무리와 탁발씨의 한족과 동화에 관하여
서위에 소속되어 있던 탁발선비의 일족은 북주가 건국된 이후 그대로 중원에 남았다. 우문선비가 건국한 북주는 인재 등용의 폭을 넓혀 오히려 전 왕조의 황족들인 탁발선비도 관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우문선비는 탁발선비의 과거 용맹성을 매우 높이 샀기 때문에 주로 무관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탁발선비의 황족이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375
73. 탁발선비의 투르크계 변환과 중원 정착, 중앙아시아의 선비계 민족 …
동위와 서위가 멸망한 뒤 동위의 탁발선비 세력들은 북제의 시조 고양에 의해 북쪽 변경인 회삭진(懷朔鎭) · 무천진(武川鎭) · 무명진(撫冥鎭) · 유현진(柔玄鎭) · 옥야진(沃野鎭) · 회황진(懷荒鎭)에 강제 추방되었다. 북제의 고양은 이들 6개 진에게 탁발선비의 황족들과 남은 씨족들을 감시하게 하였는게 앞서 언급한 6개의 진들은 효…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722
72. 북제와 북주의 성립
550년, 후경(後景)이 남조 양(梁)나라에 항복해 동위를 배신하자 고양은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을 공격하게 하고, 동위에 남아있던 후경의 처자식을 죽였다. 또한 양나라와 수호관계를 맺고, 후경을 고립상태로 몰아넣었다. (『양서(梁書)』, 卷七十,「侯景傳」, 第七 [본문] 王僧辯遣侯瑱率軍追景。景至晉陵,劫太守徐永東奔吳郡…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470
71. 북위,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북제의 고씨 집안은 고구려의 후예이…
6진의 유력자 중에 고조의 일족들이 있었는데 6진의 난을 거쳐 북위의 멸망과정에서 고조의 일족 중에서 다시 권력중추에 올라선 자들도 있었다. 회삭진 출신으로 동위(東魏)의 실권을 장악하여 북제의 기초를 닦았던 고환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또한 무천진(武川鎭) 출신의 유력자는 무천진(武川鎭) 군벌, 일명 관롱집단(關籠集團)으로…
Name: 정길선  |  Date: 2017-05-29  |  Hit: 568
70. 북위 영태후의 섭정과 6진의 난
선무제의 뒤를 이어 선무제의 차남인 효명제(孝明帝)가 황제가 되었으나 6세에 불과해 영태후(靈太后)가 섭정하게 되었다.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담당하면서 고조와 고조의 일족들을 일부 복권시켰고, 그들 고조의 일족들 중 고환(高歡)이 매우 영명하고 재능이 있어 발해 고씨 일족들은 다시 고환(高歡)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고…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575
69. 고구려계 고조의 북위에 대한 철권통치와 그의 죽음과 몰락
선무제는 외가 인척들에게 매우 극진하여 외삼촌인 고조 형제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주고 외조부 고양(高陽)과 외조모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였다. 그리고 501년, 국정을 측근이나 외척인 고조(高肇)에게 맡겼고 선무제는 정치보다는 오히려 향락에 심취하여 지냈다. 게다가 불교에 입도하여 점차적으로 불교신앙에 빠지면서 오히려 정치…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00
68. 북위, 백제와의 전쟁과 효문제, 문소황후의 죽음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고 대대적인 한족문화를 받아들이는 작업 시행했다. 이것은 풍태후도 하지 않았던 일로도 일찍이 풍태후의 섭정시기에도 이러한 제안이 들어온 적 있었으나 풍태후는 선비족의 정체성이 사라질까 우려하여 실행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효문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가장 위험한 일을 자행…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49
67. 북위 효문제, 백제와 전쟁에서 패배하다.
480년 고구려는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과 통교하기 위하여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북위의 광주(光州)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북위의 궁궐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남제와의 동맹에 대한 파기를 요구하여* 장수태왕은 북위와의 의리를 생각해서 이를 파기하고 북위와 더욱 통교하게 되었다. 이것은 …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49
66. 북위 황실과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인
476년 고구려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북위와 통교(通交)하면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고조(高肇)가 이와 같은 인물이었다. 고조(高肇)일가는 발해 고씨(撥海高氏)로 대대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던 완벽한 한족일가였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高苦)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고고의 가문은 고구…
Name: 정길선  |  Date: 2017-05-27  |  Hit: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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