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六十八年, 夏四月, 南齊太祖蕭道成, 策王爲驃騎大將軍,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魏高祖詔責王曰 ; 道成親弑其君, 竊號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交, 遠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卿舊款, 卽送還藩, 其感恩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動靜以聞.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二十六,「백제본기(百濟本紀)」, 第 四, <東城王> [본문]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祖道成, 冊高句麗巨璉, 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 請內屬, 許之,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483년 이후 고조의 정권에서 문소황후는 후일 선무제(宣武帝)가 되는 원자를 낳게 되는데『위서(魏書)』「문소황후고씨열전(文昭皇后高氏列傳)」에는 문소황후에 대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되어 있는 문소황후의 설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그녀가 어릴 때 집안에 서 있는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뜨겁게 비췄다. 이를 피해 동서로 옮겼으나 햇빛은 따라와 비췄다. 같은 일이 수 차례 반복되자 부친 고양(高楊)은 요동(遼東) 사람 민종(閔宗)에게 그 뜻을 물었다. 그는 “이는 기이한 징조로서 말할 수 없이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무릇 해라는 것은 임금(君人)의 덕이요, 제왕의 상징이다. 햇빛이 여인의 몸에 비치면 반드시 은명(恩命)이 미친다”라고 말했다."
『위서(魏書)』, 卷 十五,「文昭皇后高氏列傳」, 第 一 [본문] 她站在房子, 作為一個, 孩子來到窗口,艷陽高照熱。傷害從東, 到西移動,但隨著陽光的, 照射下閃耀。同樣的事情也幾次, 父親東高楊閔宗, 廖問其含義。 “我可以說,沒有耳朵作為, 古色古香的, 跡象.” 他說. “無論君人種美德,是主的, 象徵。陽光照在女人的, 身體有兩個恩命.” 他說.
여기서 나오는 요동(遼東)사람이란 것은 고구려인을 뜻한다. 이것은 문소황후가 고구려에서 왔다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이다. 당시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고조의 집안은 요동에서 주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470년대에 북위로 이동해 올 때 요동에서 출발하여 북위에 입국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햇빛을 받으며 자란 황후에게서 태어났던 선무제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효문제에게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일찍 태자로 책봉되었다.
488년에는 백제가 세력을 회복하여 산동성 지역에 군사를 사열하고 여러 요새들을 짓고 군 병력을 강화시키자 효문제는 이에 위기를 느끼고 산동성의 백제 요새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백제는 남제의 동맹하여 연합군으로 북위군과 맞서 격파했다. 백제, 남제 연합군과의 접전에서 패배한 북위는 489년 정월부터의 연합군 공격에 크게 위협을 느껴 그해 8월 효문제의 특사 형산(邢産)과 후영소(候靈紹)를 남제의 무제(武帝)에게 보내어 화평을 요청하고 남제의 무제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남제의 건국 시조 소도성 이래 백제와 동맹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490년 4월과 11월 북위와 남제는 서로 사신을 파견, 다시 한 번 화평관계를 확인한다.
이제 백제와 남제 간의 동맹관계가 와해되었다고 판단한 북위의 효문제는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구의 백제 군사들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백제는 북위군에 수성전을 펼치며 최대한 시간을 끌자 군량이 떨어진 북위군이 후퇴하는 틈을 타서 공격해 격파했다.* 같은 해 490년 풍태후가 죽자 효문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풍태후의 문화 진흥 산업과 토지제도 등의 개혁은 풍태후 사후, 효문제 친정 때도 그대로 시행되었다.
* 『남제서(南齊書)』, 卷 五十八, 「百濟傳」,第 十七 [본문]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 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屍丹野. 由是嶊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