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년 고구려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북위와 통교(通交)하면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고조(高肇)가 이와 같은 인물이었다. 고조(高肇)일가는 발해 고씨(撥海高氏)로 대대로 중원에 정착하여 살았던 완벽한 한족일가였다.
고조의 5세조인 고고(高苦)는 4세기 초 서진이 멸망할 무렵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갔다. 고고의 가문은 고구려에서 계속 살았고, 고조와 문소황후도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고조의 가문은 한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100여 년 동안 고구려에서 살았고, 고구려에서 학문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풍습과 문화를 배웠다. 고조의 가문은 이미 고구려화된 중국인, 고구려인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조가 470년대에 고구려에서 북위로 가자 곧 여위장군에 봉해지고, 여동생은 황후가 되면서 출세를 하게 된다.
북위로 온지 얼마 안 된 고조가 높은 출세를 하게된 배경에 대해서『위서(魏書)』에는 후한 시절 명문 집안이었던 발해 고씨였기 때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100여년 이상 고구려에 망명생활을 한 고조의 가문이 단순히 명문집안이라는 이유로 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발해 고씨가 명문이라기보다 고조의 동생 고현(高顯)은 고구려대중정(高句麗大中正)이라는 관직을 하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대중정은 고구려 출신 인물들을 천거하는 관직으로, 이는 당시 북위에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조의 가문이 이들 고구려인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고조의 집안이 고구려대중정이라는 벼슬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말한다. 고조의 집안인 발해 고씨가 오랫동안 고구려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비 고구려인이라 할지라도 고구려의 입장을 반영하는 친 고구려성향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가 출세하고 여동생이 문소황후가 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강대국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위서(魏書)』, 卷 九十九,「高肇傳」, 第 七十一 [본문]誰魏的, 高肇, 沒有採取高出勢, 天名文輯安, 漢國撥海高氏做的, 打擊。
고조의 친척인 고잠(高潛)*은 고구려에서 돌아오자 곧 북위로부터 개양남(開陽男)이라는 작위를 부여 받고, 부마도위가 되었다. 또 다른 친척인 고윤(高允)은 북위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대접받았다. 그리고 고조는 북위 효문제의 여동생인 고평공주(高平公主)와 혼인하여 상서공(上序公)이라는 관직에 올랐으며 고조의 인척들인 고구려 세력들이 잇달아 고위 관직에 올라 북위의 정권을 장악했다.
* 고잠의 조부인 고무는 형 고고와 함께 영가의 난(永嘉之亂)때 고구려에 망명하여 요동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잠 역시 고조와 함께 친 고구려적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 『世說假譎篇』,『文淵閣四庫全書電子版』, 北京 : 迪志文化出版, 1991.
이처럼 친고구려적인 인물들이 대거 국정에 진출했기 때문에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 강경책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수 양제 때 발해 고씨가 숙청된 것은 고구려에 대한 중원 측 국가의 대응책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볼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와『위서(魏書)』「고구려전(高句麗傳)」을 보면 양국 간에 정략결혼이 성사되려 했던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북위가 결혼을 먼저 청하고 고구려가 이를 거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위서(魏書)』「정준열전(程駿列傳)」*과「고조열전(高肇列傳)」*을 보면 당시 고구려의 장수태왕이 먼저 북위에 정략결혼을 청하여 고조의 여동생인 문소황후가 북위의 효문제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검토해보면『위서(魏書)』「고구려전(高句麗傳)」의 고구려가 북위의 결혼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사서의 기록을 오판하여 나온 것으로 보인다.
*『위서(魏書)』, 卷 百六,「高句麗傳」, 第 八十八 [본문] 馮太后, 使臣發送到高句麗, 高句麗王室的, 公主,獻文帝, 政略結婚, 是一個提議。高句麗王璉, 關於它“公主的出家婚姻的, 奧古斯都和, 成事場女會”,他花了便紙。這種認識是, 馮太后和, 尙書安王眞, 樂李國境, 敷派遣, 發送幣帛有...(중략)...接受高句麗王璉, 便紙發回魏兄弟的, 場女非常憤怒, 與死者馮太后, 發送假散騎, 常侍程駿, 高句麗王璉, 另一個種室, 發送任何女, 孩不同。
*『위서(魏書)』, 卷 六十五,「程駿傳」, 第 四十八 [본문] 延興末, 高麗王璉求納女於掖庭, 顯祖許之.
*『위서(魏書)』, 卷 九十九,「高肇傳」, 第 七十一 [본문] 高麗王璉, 一個請政略結婚, 第一魏高肇, 文昭皇后的, 妹妹結婚, 孝文帝的魏.
더욱이 중국 사가들은 기록을 할 때 위한휘치(爲漢諱恥)라 하여 한족의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것으로 볼 때 고구려의 장수태왕이 북위에 먼저 결혼을 청하여 고조의 여동생을 북위 효문제와 결혼시켜 북위의 왕을 고구려의 사위로 삼음으로써 북위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북위의 정치에 일정부분 영향을 행사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추가적으로 연구가 필요한 것은 고조가 장수태왕과의 관계와 그가 고구려 왕실에 속한 자였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이것은 장수태왕이 북위에 대해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하고 고구려계 관료들이 북위의 정권을 잡았던 부분에 대한 신빙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장수태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는 소위모라는 흰색 모자와 포심의라는 상례 때 입는 옷을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곡을 하며 “고구려 장수왕이 돌아가셨다. 내가 비록 생전에 그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름은 널리 퍼져서 잘 알고 있다.” 고 애도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문소황후가 된 고조의 여동생은 선무제(宣武帝)를 낳아 고씨 가문과 북위 황실의 관계를 두텁게 하였고 고조의 조카인 고맹(高猛)은 장락공주(長樂公主)와 혼인함으로써 북위 황실과 3중의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第 十八,「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第 六, <長壽王> [본문]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 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諡曰康.
고구려인 문소황후 능의 비석 탁본
북위 효문제의 고구려인 문소황후 고씨의 능
고구려인 출신으로 문소황후를 등에 업고 북위 조정을 농락한 권신 고조(高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