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족(黎族)은 주로 치우가 다스리던 구려국(九黎國)의 주 종족이었다. 이들은 치우와 황제 간의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양자강 이남으로 남하했다. 해당 전쟁과 관계없이 남하한 이유는 황하와 장강 사이에 자리 잡은 한족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그 알력에 밀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묘족과 함께 이동하였는데 여족은 묘족과 더불어 각 씨족으로 분류되어 남하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여기에서 묘족과 여족의 씨족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일부는 강소성, 절강성으로 들어가 오나라와 합류했고 일부는 절강성, 복건성 일대로 들어가 월나라와 합류했다. 그리고 다른 일부 여족은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안휘성 일대로 들어왔다. 이러한 사이 여족 뿐 아니라 장족(壯族)과 묘족 일부, 그리고 묘족에게서 파생된 요족(遙族)과 웅족(熊族)이 내려왔는데 이들 중 웅족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고 보여 진다.
이들 웅족이 초(楚)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史記-楚世家』에 의하면 초나라에 건국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顓頊高陽)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나타난다. 전욱은 창의(昌意)의 아들이고, 그 후손 육종(陸綜)은 축융(蹴隆)의 동생으로 제곡 고신(帝嚳高辛) 때 화정(火正)이라는 고대 중국의 불을 관장하는 관직을 지낸 오회(吳回)의 아들이다. 주나라 문왕 때 계련(係蓮)의 후손 중에 육웅(鬻熊)이 있었는데, 육웅이 초나라 웅족을 이끌었던 시조로 생각된다. 육웅의 증손자인 웅역(熊绎)에 이르러 주나라 성왕(成王)은 주나라 건국시에 주 문왕과 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이라는 귀족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의 태수로 봉했다. 하지만 그의 봉지는 남작에 하여 주었다.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團陽)으로 정했다.
서주 이왕(利王) 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오(楊奧)에서 악(鄂)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이후 웅거는 잠시 왕으로 자칭하다가 포악한 서주 여왕(厲王)이 즉위하자 정벌 당할 것이 두려워 왕의 칭호를 삭제했다. B.C 841년에 서주 여왕이 국인(國人) 폭동으로 퇴출되자, 주나라는 잠시 공화기가 되어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초나라는 그러한 혼란을 틈 타 조금씩 세력을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B.C 822년에 웅승(熊勝)이 자작이 되자 군위를 둘러싼 내부 분쟁이 없어졌고, 내부 분쟁에 쓰던 힘을 통합하여 외부로 돌리니 초나라는 마침내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약오(弱吳), 소오(素吳)와 분모(紛募)가 자작이 되니 초나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근방에 있던 당시에 가장 강한 국가인 수(洙)나라와 남방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B.C 741년에 웅통(熊眴)이 분모의 세자를 죽이고 자작이 되었는데 그가 초나라 무왕(武王)이다. B.C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覆)의 영지를 개간하여 초나라 영토로 삼았다. 이후 B.C 690년 초 무왕의 뒤를 이은 초 문왕(文王)은 도성을 단양에서 영(郢)으로 천도했고, B.C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B.C 637년 송나라 양공(養公)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에 소집하자 초 성왕(楚 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나라 양공을 포로로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B.C 631년 기(夔) 나라가 조상인 축융과 육웅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같은 해 여름 성복(城扑)에서 당진(唐晉)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였다. B.C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은 왕이 자신을 태자 위에 폐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초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초 목왕(穆王)이다.
B.C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그가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초 장왕(楚 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지배하는 국가로써 패자에 등극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초나라 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B.C 223년 진(秦)나라의 장군 왕전(王揃)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項燕)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B.C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과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초, 한 쟁패기에 초 의제(楚義帝)를 군주로 세워 초나라가 재건되었으나, 의제가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했고 항우도 한나라 유방에게 패망했으며 잔존 세력은 한나라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서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초나라 패망 후 여족은 대부분 한나라에 종속되었으나 일부 여족은 남방으로 이동하여 조타에 의해 건국된 남월(南越)에 합류한다. 이는 한나라 고조 이후 광동과 복건, 광서 지역에 자리 잡은 조타의 세력이 강력해지자 초나라와 월나라에 기조를 이루었던 여족이 한나라의 지배에 항거했고 이에 남하하여 조타의 세력에 합류했고 이러한 세력들의 기반을 얻은 조타는 한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남월(南越)을 건국하여 왕이 되면서 남방이 패자로 알려지게 된다.
<사진> 초나라를 대표하는 북, 학은 양이고 해태은 음, 음양을 상징한다. 그리고 가운데의 해의 모양은 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