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족 국가 중 가장 부패한 나라 명(明)나라, 그리고 북로남왜(北虜南倭)
이틀 전까지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에 대한 포스팅의 후속편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복건, 광동 지역의 상권이 활발해지고 정지룡과 왜구와 같은 해적 활동이 활발해진 것에 대해 그 배경이 있다면 그 지역들을 관리하고 있던 명나라 정부가 매우 부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패한 사정으로 인해 국방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고 북쪽의 몽골이나 타타르, 오이라트의 공격을 받았으며 남쪽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두고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한다.
북로(北虜)에 관한 부분은 나의 전공이니 매우 잘 알고 있어 패스할까 말까 하다가 정지룡과 정성공이 활약하게 된 배경에는 북로남왜와 배경을 언급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가장 명나라 조정 부패의 큰 원인을 짚고 넘어가야 할듯 하다.
주원장에 의해서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영락제(聖祖)가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建文帝)를 축출하고 황제가 되어 있었다. 영락제는 명나라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고 많은 숙청을 통해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는데 당시 명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웠던 개국공신들이 이례적으로 모두 숙청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특히 건문제를 따르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10족을 멸하는 중벌을 가했는데 이는 정상적으로 제위를 물려받지 않고 찬탈했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인 트라우마(Trauma)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 정당하지 못한 황제 지위 승계 때문에 영락제는 대신들보다 환관들을 중용했고 그로 인하여 환관들의 세력이 신장되었다. 영락제 말년에는 환관들이 국정을 맡아 국가를 운영했으며 이로 인한 국가적 비리 및 경제적 폭리 행위가 나타나게 되었다. 황제에게 집중된 권력은 측근의 외척이나 주변 인물들에게 비정상적인 권력의 개입을 허용하곤 하였다. 대표적으로 환관이 그 중 하나로 보는 견해들이 많다.
원래 환관들이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춘추, 전국 시대이다. 몇 가지의 유례로 본다면 중원을 최초로 통일하였던 진나라도 환관의 전횡이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환관 조고(趙高)는 시황제기 죽은 후 유언을 위조하여 장남인 부소가 물려받아야 할 제위를 막내아들 호해에게 계승시킨 후, 권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전횡을 저질렀다.
한나라 시대에 들어오면서 환관들이 무리를 지어 하나의 파벌을 만들게 되었고 이들 집단 적인 환관의 무리들은 단체로 전횡을 단행하여 국가 사직을 존폐의 위기로까지 치닫게 하였다. 후한 시대에는 환관이 작당하여 황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강직한 기질을 지닌 문무 대관들을 모함하여 몰살시키기에 이르렀다.
명나라 정치사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은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인 학자들이 아닌 환관을 스승으로 두었으며 태자가 즉위하였을 때 정치적인 조력자로 배후에서 조종하는 경우 많았다고 하였다. 그것은 대신들과 외척들의 월권을 두려워 한 황제가 태자의 스승을 환관들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태자는 환관의 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조 형태를 띄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살펴본 환관 정치의 유형은 진나라 시대에 조고가 단독으로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렸다면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집단으로 뭉쳐 파벌을 형성함으로써 서로를 보호하는 완충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이들은 단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본인들의 권력에 해를 끼칠만한 자들은 황제라도 제거하였으며 집단적인 부정축제로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를 정도의 해악을 끼쳤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의도적으로 환관을 가까이하여 중앙 집권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표적인 부분은 태자의 스승으로 환관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환관은 태자와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키우는 등,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특징을 둘 수 있다.
이러한 환관들이 역대적으로 전횡을 부릴 수 있게 되는 배경의 공통점은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신료였기 때문이다. 다른 신하들과 달리 궁궐에 함께 거처하기 때문에 자연히 황제와의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때로는 황제가 의지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황제는 환관에게 중요한 정책의 결재나 명령을 대신 작성하게 하기도 하고 비정상적인 공작정치나 궁중의 은밀한 연락 등을 맡기기도 한다.
이는 환관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황제가 공식적인 정책 결정 과정을 배제하고 황제의 전제 황권을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최고 관직인 내각 대학사(大學使)가 정책 수립에 필요한 건의안을 올리면 황제는 이 건의안에 대한 생각이나, 승낙 혹은 반대의 뜻을 교지 형식으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환관이었다. 이러한 교지를 환관이 대필하는 것이다.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수록 환관이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거나, 황제에게 접근하는 신하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환관이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가까이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환관이었다. 그러한 특권으로 인하여 황명이 남발하게 되고 황제의 권위가 떨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명나라는 영락제의 명분 없는 쿠데타로 인하여 이러한 비정상적 정치 구조를 양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환관 정치의 극단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명나라가 처음부터 환관 정치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 개국 초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이미 진나라와 한나라가 환관의 횡포로 말미암아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특히 환관들로 인하여 중앙 집권이 붕괴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주원장은 환관들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리고 명나라 시대의 국법인『대명률(大明律)』에 다음과 같이 남겨두었다.
『대명률(大明律)』, 卷第 9장 1조
① 내신(환관)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정치에 개입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② 환관의 수를 100명 이하로 하고 급여 또한 쌀 다섯 두 이하로 책정한다.
이는 건문제 때도 계속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환관이 ‘정난의 변(靖難之變)’ 때 영락제와 내통하여 영락제의 황제 즉위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 대한 대우를 개선시켰다.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궁전을 넓히고 환관의 수를 수천 명으로 늘인 데 이어 위계질서에 따른 환관의 직책을 만들었다.
그 중 가장 높은 고위직이 사례감(司禮監)이었다. 공식 문서에 황제 대신 대필하는 병필태감(秉筆太監)도 사례감에서 나왔다. 영종 이후에는 궁중 뿐 만 아니라 지방 장관 아래에 감찰관(監察官)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락제의 밀실정치에는 관료보다 환관의 활용도가 컸다. 영락제는 그의 집권 시기에 환관이 대두하기 시작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4대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 대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상주서(尙主書)마저 환관들이 대필하게 되면서 환관들의 권세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환관의 횡포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5대 황제인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 때 가장 부패한 환관 정치가 도래하게 되는데 이는 왕진(王振)의 전횡에서 환관 정치의 정점을 찍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