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족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묘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며 형성된 정확한 정론은 없다. 하지만 묘족의 선조는 상고시대의 구려(九黎), 삼묘(三苗) 및 남만(南蠻) 종족집단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려(九黎) 부락연맹은 최초에는 황하 중하류 일대에서 거주하였으며 후에 일부 부락이 남으로 이동하여 양자강 및 회하(淮河)유역에서 삼묘(三苗) 부락연맹을 결성하였다. 상주(商周)시대에는 한족들이 남만(南蠻)으로 부르던 이 종족 집단은 초(楚)에 의하여 통합, 지배를 받았으며 형만(荊蠻)이라고 불렸다. 이후 B.C 3세기에 진(秦)나라에 의하여 초나라가 멸망하면서 형만의 상당수는 점차 한족 사회로 흡수, 동화되거나 다른 일부는 전쟁과 한족의 압박을 피하여 점차 남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러한 묘족은 구려(九黎)의 통치시기에 치우의 주 종족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중원의 패권을 두고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 대한 전설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龍魚河圖』에 의하면 치우의 형제는 모두 81명으로, 구리 머리, 쇠 이마,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하였는데 그들의 무위가 천하에 떨쳤다고 전해진다.『苗族簡史』에서 전하는 것에 의하면 치우는 고대 여족(黎族)의 수장이었다. 당시 여족이 상당히 많이 분포하여 구려(九黎)라고 하였는데 鄧名世의 기록에 의하면 ‘구(九)’는 대단히 많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장강 남부 지역의 광대한 종족 분포를 근거로 9개의 여족(黎族)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보여 진다. 이렇게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치우는 강대한 부족 연맹의 대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초인간적인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었으며 중원을 지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묘족(苗族)과 함께 탁록에서 황제, 염제(炎帝)의 연합군과 대전쟁을 벌였다.
황제는 응룡(應龍)과 황제의 딸인 발(魃)의 도움을 받아서, 치우의 군대와 구려족과 전투를 벌였으나 그 결과에 대해서 여전히 분분하다. 탁록 전투 이후 염제와 황제의 연맹은 결렬되어 판천(阪泉)에서 몇 차례 대전을 벌인 끝에 웅(雄), 비(俵), 비(被), 휴(頓), 추(針), 호(虎)가 황제의 세력에 합세함으로써 결국 황제가 승리했다. 황제는 황하 중하류의 부락 연맹의 수령이 되면서 이 지역을 본래 다스리던 민족들이 서서히 밀려 각지의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남, 산동, 하북 지역으로 이동한 동이족과 산서성과 내몽골 지역으로 이동한 북적, 감숙성, 섬서성 지역으로 이동한 서융족이 그것이다. 따라서 황제의 한족은 황하 유역에서 최강의 부락 연맹이 되었고, 권력의 강화로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어 나갔다. 요(堯), 순(舜), 우(禹)의 등극과 함께 더욱 공고한 사회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생산력은 물론 문화 예술도 상당히 발달하게 된다.
이에 구려국도 황제의 세력에 밀려 점차 남하를 하게 된다. 이 때 함께 남하한 부족들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부족은 묘족으로 기타 여족, 장족, 웅족(熊族), 만족(蠻族) 등과 함께 장강 남쪽으로 이주한다. 이는 치우의 통치 시대 이후 북방에서는 고조선 건국과 맞물려 대대적인 세력 개편 중 일환으로 보여 진다. 이에 요(堯), 순(舜), 우(禹) 시대를 거치면서 이들 세력은 중원 한족에게 점차 밀리는 양상을 띄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요, 순에 대해 항거하였다가 그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남하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제 황제 부락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악화됨으로 인한 세력 축소 및 분할이 되어 황하 일대를 지배할 수 있는 국가적인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신농씨(神農氏) 염제(炎帝) 부락도 중간의 환웅(桓雄)의 일부 부족과 연합을 이루어 서서히 서남쪽으로 이동해갔다.* 특히 이들 민족들은 고촉문명(古蜀文明)을 이루었던 원주민들, 유목민족인 강족(羌族), 티베트 원(原) 민족인 장족(藏族)간의 대규모의 전투와 민족혼혈을 이루어가며 약 수백 년 동안 정착지를 찾아 이동했다. 이들은 본격적인 씨족 사회 시기에 중국 귀주 지역 산악지대, 운남성 서남부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 지역의 원주민마저 흡수해 거대 세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어 광서, 광동 지역까지 진출하여 주강 지역을 점유하면서 농사를 지을 터전을 확보하게 된다. 이들은 지금의 북베트남에까지 세력이 확대되었고 이 지역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락룽꿘과 어우꺼 신화의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이 현재 베트남의 주 민족인 낀족(Kinh)으로 기존의 여족, 묘족과 달리 신농씨, 혹은 염제신농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
* 이와 같은 상황을 말하자면『揆園史話』의 내용을 열거할 때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 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쌈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 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嵎夷)와 래이(萊夷) 및 회이(淮夷)와 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涿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蚕織牧, 資以爲業. 且, 南鄙海島之民, 皆以蠙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 『尙書』所稱, 嵎夷 ‧ 萊夷 ‧ 淮夷 ‧ 島夷者, 皆是也.)
묘족은 나름대로 그들 민족들의 성격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황하 유역을 비롯한 중원 지역, 장강, 한수(漢水) 지역 등 몇몇 고대 문명 지역들은 매우 풍부한 인구와 산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하 지역과 장강 유역 등의 인구와 경제력은 완벽하게 보존되어 전해 오고 있는 반면에 중원의 평야와 산악지대는 명확한 체계 없이 산만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탈취하기 위해 북방 유목 민족이 자주 침입해왔고 장강 남부 지역은 이러한 북방 민족들의 침입에서 무사했지만 한족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장강 남부 지역은 한족과의 투쟁이 주 전쟁 중 하나였으며『山海經』,『淮南子』,『楚辭』,『穆天子傳』,『莊子』,『國語』,『左傳』등의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 묘족은 오늘날 중국 남부의 안휘성(安徽省), 호북성(湖北省), 강서성(江西省)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묘족은 구려국을 구성했었던 다른 부족들과 쟁패를 벌이다 강소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들 민족들은 비록 중국사에 있어 비주류로 들어가지만 역사적 중심지인 황하와 장강 사이의 중원과 가까우며 항상 중원을 공격할 계획이 숨겨져 있다. 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보다 비좁은 강소성에서 넓고 농사짓기에 적합한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부분으로 이는 끊임없는 삶의 투쟁인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강소성 지역은 각 호수, 강을 끼고 있어 강력한 수군이 없이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용이했다. 그리고 해당 지역을 개간하고 절강성 지역까지 활동 무대를 넓혔다. 수로를 매워 땅을 개간했고 이는 후일 수나라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할 때 근본이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