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 (1890 ~ 1981)
하느님이 계시느냐고 물으면 나는 '없다'고 말한다.
하느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사람의 마음이 하나(절대)를 그린다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
내 몸에 선천적인 본능인 육욕(肉慾)이 있는 것이 이성(異性)이 있다는 증거이듯이
내 맘에 하나(절대)를 그리는 성욕(性慾)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바라고 그리는 전체의 거룩한 님을 나는 하느님이라고 한다.(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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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인간이 제나와 얼나로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제나는 몸나와 맘나를 합해서 이른 말인데, 제나의 본능은 獸性이라 보고
얼나의 본능은 靈性이라 보았습니다.
짐승 성질인 수성의 본능은 貪瞋癡로 나타나고, 영혼에 해당하는 얼나의 본능은
眞善美로 나타납니다. 굳이 性善說이나 性惡說에 대비해 본다면 "性本能說"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탐진치의 肉慾이든 진선미의 性慾이든 선생이 本能이라 표현한 이상, 본능 그 자체는
善도 惡도 아닙니다. 다만 개체인간들이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 생존조건상, 피해와 고통을 가져올 죄악의 혐의는 탐진치의
육욕쪽이 훨씬 우세합니다.
그래서 선생은 영성의 진선미로 수성의 탐진치를 눌러 이기고, 부모가 주신
"육신의 나"에서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 솟나자고 한 것입니다.
선생이 얘기한 수성의 본능을 요즘 언어로 풀어보자면 食,衣,住라는 자기 육체보존
본능과 생식유전자 생성 그리고 생명체 자립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 食,衣,住 세 가지 본능은 정자와 난자가 모태에서 수정하는 순간부터
바로 발현되지만, 종족번식을 위한 정자와 난자의 생성이나 태어난 생명체를
자립할 때까지 보살피는 본능 등은 육체가 어느 정도 성숙된 상태에 도달된 다음에야
일어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의 본능을 다시 풀어보면,
선생이 얘기한 진선미는 목적의 최선을 추구하는 眞, 관계의 최선을 추구하는 善,
조화의 최선을 추구하는 美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진선미의 세 가지 본능은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다양한 학습과 교육
그리고 자신의 실존적 자각을 통해 서서히 발전해나가는데 그 결과가 윤리, 도덕 등
의식의 향상으로 나타납니다.
이 지점에서 선생이 밝히지 않은 영혼의 본능 두 가지를 더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선생은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고 했습니다. 얼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영혼을 가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결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문화와
문명을 만드는 힘입니다. 그럼 그 힘은 어디서 생겼을까? 바로 관심과 호기심입니다.
이를 좀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느끼고 싶다"는 본능입니다.
이거저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가지고, 누리고 싶은 수평적인 量적 본능과 특정한 느낌을
보다 더 깊이 더 실감나게 느끼고 싶은 수직적인 質적 본능 이 두 가지입니다.
호기심과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본능이 결국 인류의 문화와 예술, 정치,
경제, 종교 등을 다양하게 발전시켜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얼나의 본능은 육체적으로 성인이 되기 전이라도 가동을 시작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보이는 각종 호기심이나 "왜?"라고 대변되는 왕성한 궁금증과
문제의식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보통 성인들에게 있어서 윤리, 도덕의 모습으로 갖춰지게 되는 진선미 세 가지의
본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얼나의 "느끼고 싶다"는 두 가지의 본능이
자신의 소유욕과 그 자체의 만족감으로만 기울어 타인에게 잘못을 행할 가능성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얼나의 본능이라고 해서 항상 선한 쪽으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일수록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느끼고 싶다"는 얼나의
가치중립의 본능이 보다 정의로운 진선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 그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본능은 "느끼고 싶다"는 것입니다.
금지와 억압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느끼고 사는 삶과 절제하는 삶 사이에서 중용을
찾는 노력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