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에 빌붙어 있지도 않은 충성심으로 하찮은 목숨을 연명해가는 별볼일 없는 인생이 있는가하면 또 누구는 있는 돈으로 일생을 편안하게 살아갈수도 있지만 굳이 힘들고 어려운 구국운동이나 타인을 위해 봉사, 헌신하며 살아 간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의 선택 문제인데 예나 지금이나 손바닥 뒤집듯 선택을 바꾸기도하고, 한번 선택을 끝까지 지키며 신의를 다하는 경우도 있다. 안동김씨 세도가문의 후예로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 장군은 무엇 때문에 노비문서를 다 불사르고 그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 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황해도 만석군의 맏아들로 태어난 안중근은 무엇이 답답해서 출생과 동시에 보장된 부귀영화를 내팽개 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는가? 나라잃은 백성을 절망과 도탄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숭고한 심리적 동기가 부귀영화를 헌신짝 처럼 버리고 그들을 기약없는 독립운동으로 투신케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시대 어느나라에도 이상을 추구하는 고상한 부류의 사람들보다 기회주의자들의 숫자가 많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경우를 많이 보게되는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들 기회주의자들에게는 대세가 어디로 흘러 가느냐, 누가 권력을 잡느냐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며 이상이나 어려운 시대임에도 바르게 살아가려는 신념 따위는 하등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결국 한문화적 그리고 철학적 관점에서의 인생이란 공부냐 아니냐다. 내가 죽으면 자손이 기일에 학생부군신위로 추모하는 것을 예로 한다.
학생으로 살다 죽은.. 뭘 배우다 간걸까. 학생의 의미는 크다. 무언가 배운다 라는것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데 대략의 목적이 있다. 몸을 키우다, 재물에 정성을 들이다 간 인생들. 막 되는데로 살다 간 하루살이식 인생들이 더 많다. 많은 인생衆生이 부디 공부하는 인생이길 바라지만 벼슬께나 한 분들은 죽어서도 공부 많이한 대접을 받으니 지식이라도 많이 쌓아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도 공부이니까. 정말 모르면 헛소릴 하게된다. 모르면 약이라고? 이 시대에는 그것 또한 헛소리다.
원효의 오도송 생즉종종법생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죽음이나 다름 없다. 원효대사의 말씀이 대신 설명이 될런지 모르겠다. 공부를 하기로 작심하면 어떻게든 길을 가게될진데 공부하다 옆으로 새는 불량학생들이 요즘 공부판을 많이 어지럽힌다. 필자는 원효대사의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부하는 진짜 방법을 이야기하고자 할뿐 불교관을 퍼뜨리고자 하는 일은 아니다. 좋은 밥먹고 쓸데없는 짓거리가 되지않길 바랄뿐이다.
시대적 상황에따라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애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解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 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一切無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원효 스님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한문화의 기본 틀을 확립할 수 있었다. 단박에 끝낼수있는 공부는 없다.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돌아와 열심히 정진하고 있을 때에 그 당시 서라벌 장안에 유명한 걸승이 있었는데 대안大安이라는 스님이었다. 이 분은 스님 복장보다는 떠돌이와 같은 복색을 하고 다니면서 저자거리를 대안大安(크게 평안 하라)하며 외치고 다녔다. 하루는 정진하고 있는 원효를 찾아와 말했다. '남산의 어느 굴에 어미 잃은 강아지가 있는데 당신이 가서 염불을 좀 해 줘야겠오.' 하며 원효를 데리고 갔다. 과연 굴에 가니 죽은 어미의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고서 깽깽 거리며 울고 있는 눈도 채 안뜬 강아지들이 있었다. 대안이 말했다. '자! 이놈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염불을 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원효는 그 자리에 앉아서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대안스님이 '여보시오 이리 나오시오. 그 강아지들에게는 그렇게 경을 해서는 안 되오.' 그러자 원효는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오?' 그러자 대안 스님은 나가서 죽을 끓여 와서 강아지 한 마리 한 마리 의 입에다가 죽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원효를 보고 '이 놈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염불이요.' 그 말에 원효는 해골바가지에서 깨달은 마음법과 함께 걸림 없는 무애 실천 사상의 큰 틀을 이룰 깨달음을 얻었다. (후에 대안스님은 원효의 몇 않되는 스승으로 호칭되었다.) 말로하는 일체유심조는 텍스트로만 이해한다. 이렇듯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것인지를 걱정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과연 애국애족을 실천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부디 말만 하는 나라사랑이 아니길.. 쇼만하는 줄서기 이웃사랑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글 : 배달문화원 임보환 원장
출처 : 참환역사신문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