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상하게 新羅人이고 新羅語로 "韓語"로 "韓族" 麻古 三辰의 백의민족이고 白木[신라]로 주 적통족으로 "하나겨례'의 알자[●子]로 "卵生"을 기본으로 하는 日本=白이라는 개념이 말살당했습니다.
즉 고조선-대부여는 "신한조선"이 태자국으로 "단군세기" 단군조선이 신한으로 신한 夫餘가 바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夫餘로 그곳이 신한6부가 신라를 신한의 이름을 徐羅로 斯盧로 소호 금천씨가 주족인 "白族"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이다.
즉 고조선/대부여-신한/동명-신라-고려-조선-대한으로 이어진 국통맥이고 민족도 韓族으로 삼한족이라는 삼한일통 마고지나의 태자로 마의태자로 일이관지한 민족입니다, 우리가 단군조선이고 대부여고 신한이 신라다,
고조선 수 1908년 기원전 426년까지의 이야기만 나오고 바로 기원전 194년의 "위만조선"이 나오는데 이는 겨우 한사군이라는 4군지로 郡은 "사방 2-300리"로 사방 800-1200리의 州의 반쪽이다 즉 번한조선의 滄海는 료하의 북부에 예하[濊河]로 호타하 혹은 창해를 위주로 한 하북성 유주[幽州]라는 곳의 4개군으로 "현토군, 임둔군, 진번군, 낙랑군"이나, 실제는 설치?가 되었는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었다고 해도 바로 기원전 82년에 二府로 그리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濊"로 고구려 맥국이고 신라 진흥왕 551년에 거칠부가 맥국 10개군을 정벌하여 삭주로 우수주 우두주로 이는 고려의 춘주로 조선국 이 방원에 의해 州가 고을 주로 "춘천"으로 떨어진 곳으로 그렇다면 4군은 "강원도 "춘천"에 4군이, 즉 사방 50리의 200리정도로 그려야하는데 영 이상한 "이이 병신도"는 드립다 크게 그려놓고 질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신라는 삼한설에 의거 "진한의 斯盧國"에서 일어난 사방 50리-100리고 기원후 5세기까지 겨우 邑으로 도시국가형태로 사방 100리??로 이건 개새끼중에 개새끼로 이 어녕의 "현대판 신라인들"이 아니고 "현대판 개새끼 백제왜족 木子씨들이다."
우리는 이 지도를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구려도 句麗 卒本扶餘에서 구려/고구려로 사방 2000리다, 즉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고 기원후 3세기에는? 사방 1000리로 겨우, 즉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타격을 심하게 받았으나, 고구려는 재정비한 것이고 위나라는 바로 5호16국에 의해 나라자체가 사라집니다 고구려 최대강역으로 "장수왕" 496년경의 지도라고 하는데 구당서에 의하면 "남북 2000여리, 동서 3100여리" 즉 사방 6200여리로 수와의 전쟁후 당나라시의 강역은 사방 6000여리다, 그럼 저 그림이 과연 사방 6000리인가? 아니다. 아니다고 하니, "김 용옥"은 더 북쪽으로? 남북 2000리에 늘려도 "동서 3000여리를 더 늘려야지 이건 어디 동서는 막혀 있는 한반도에서 동서 1000리를 넘길 수는 있는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유는 바로 "맥족"의 근거지는 "북방초원지대"지 간도 알주도 아닌 만주평원이라는 만주 북방고토지역이 아닌 족을 가져다가 놀고 있는 쪽발이+유태잡배의 종교역사학으로 인한 개망신 매족에 賣國奴들의 국사편찬으로 인한 현행 국사교과서의 개소리역사로 똥칠사를 개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서 "신라"를 중심으로 두고 쓴 역사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라가 중심으로 알자로 고구려-백제보다는 "신라" 삼국통일을 위주로 발해? 등은 사이드 역사로 주변사로 처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신라-고려의 정통론으로 발해사라는 말갈/발해 즉 대진국의 이야기는 世家로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통일신라-고려의 주강역이 아닌 료서로 료하의 서쪽으로 마한지지로 "섬서성, 몽고자치구, 감숙성, 더 넓게는 "청해성"으로 "료서[遼西]라는 말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료동과 료서의 기준은 고조선사 위서라고 하는 고기류에서는 일률적으로 "료하를 중심으로 료서는 료하의 서쪽으로 재서로 료동은 료하의 동쪽으로 료주/산서성 유주/하북성으로 말한 것을 인지해야 하는데 이보다는 료녕성? 이건 1926년 짱개 더러운 蔣介石이 客家족이랍시고 되놈 청나라가 17세기 조선국으로부터 탈취한 동녕부를 '봉천성"으로 이 이름을 료녕성으로 료산?료수가 그곳에 녕산의 동쪽이? 어째서 료산/ 료하? 어디가 료산인가? 료하의 동쪽이면 료하는 황하로 河는 고래로 황하로 이를 료하로 료하의 근처 료서와 료동을 료주로 한 것인데 우리는 맨날 속고 살고 있습니다.
료하의 동서가 료동/료서로 료주로 이는 료서, 섬서성과 료동/료주로 산서성 그리고 유주로 아는 곳은 현 하북성으로 이 또한 시대별로 달리 이야기하나 우선 사서의 내용대로 하북성의 엣지명이 바로 유주니 그 하북성내에서만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후에 산서성도 "유주'로 하나인지 등은 차례차례 연구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시급한 것이 바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한반도"내 지명이 아닌 대륙지명인 이유는 바로 대륙 료하의 번한조선과 그 이남으로 "대륙백제와 대륙신라 그리고 산서성과 하북성의 사방 6000리의 고구려와 남쪽 재서의 백제와 재동의 신라의 대륙삼국이야기고 북부 간도는 夫餘로 서라/사로라는 신라지지다.
중심지점으로 한사군을 본다면 바로 滄海라는 예국 예맥/조선-동예로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집중으로 나오는 濊는 어디냐?
예전(濊傳)[교82][註001]
예(濊)[註002]는 남쪽으로 신한(辰韓)[집해1], 북쪽으로 고구려(高句麗), 옥저(沃沮)와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다다르니[집해2] 지금 조선(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집해3] 호(戶)는 2만이다.
옛날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가서 8조지교(八條之敎,여덟 조의 가르침)를 지어 가르치니[집해4] 문을 닫아걸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하지 않았다. 그 40여 세(世) 뒤, 조선후(朝鮮侯) 준(準)[교83]이 참람되게 왕(王)이라 칭했다.[집해5][註003]
(진秦나라 말에) 진승(陳勝)[註004] 등이 봉기하여 온 천하가 진(秦)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民) 수만 명이 조선(朝鮮)으로 피난했다.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추계[魋結,몽치모양(魋=椎)으로 상투를 트는 것]하고 오랑캐의 복장(夷服)을 입고는 또한 와서 왕이 되었다.[집해6]
한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쳐서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4군(四郡)을 설치했다.[집해7] 이때 이후로 호(胡), 한(漢)이 점차 구별되었다.[註005]
단단대산령(單單大山領)[집해9]의 서쪽은 낙랑(樂浪)(군郡)에 소속되고 (단단대산)령 동쪽의 7현(七縣)은 (동부)도위(都尉)가 주관하였고[집해10] 모두 예(濊) 사람들을 백성(民)으로 삼았다. 뒤에 도위(都尉)를 폐지하고 그 거수(渠帥,우두머리,수령)를 봉해 후(侯)로 삼았으며 지금의 불내예(不耐濊)가 모두 그 종(種)이다. 한나라 말에는 다시 (고)구려(句麗)에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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句麗에 복속된 후의 이름은 貊국이고 삼국사기 등에는 진흥왕조에 "거칠부"가 맥국정벌로 10군을 정벌하고 철령으로 이어지는 남북로를 이었다 즉 기원후 551년의 일로 단순 10개군이 아니고 한사군 등 10군으로 전 예국-매국이라는 곳을 정벌한 것으로 우두주/우수주로 삭주로 이것이 고려시대에서는 "춘주" 조선시대에는 이 방원에 의해 조선지리지에 "춘천"으로 한 곳을 일컫고 있습니다.
"백제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음력 5월 어느 날 왕이 말했다. "북쪽 말갈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삼국사기)" 그리하여 온조는 하북 위례성을 떠나 하남 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백제는 이후 북방 침략을 피해 웅진과 사비로 끝없이 남하하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멸망했다.
그 남하의 첫 번째 원인 제공자가 바로 말갈, 그러니까 백제 북쪽 변경을 침공하던 맥국이다. 말갈은 동북아시아 도처에 분산돼 살던 족속을 통칭하는 말이다. 여러 고서에는 이 맥국이 지금 춘천 땅에 있던 부족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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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지리지 태종과 세종의 조작된 역사와 지리지의 내용을 보고는 삭주의 역사, 고구려 맥국을 정벌한 551년 "진흥왕"조의 거칠부의 800여리 북진하여 고구려 맥국을 즉 10개군을 정벌하고 철령으로 연결하는 고구려 맥국을 일거에 정벌하고 이를 우두주 즉 삭주로 우수주로 고려시대 "춘주"로 명한 것으로 이 지명으로 예국/예성, 등등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는 "滄海" 지역의 예국/예성으로 일련의 통로가 연결됩니다.
예국의 역사로 "강릉" 명주?로 신라시대 명주와 춘주 우수주는 춘천으로 해서 마치 "한반도"내에 현토, 임둔, 낙랑군이 강원도 함경도일대에 있는 것으로 조작해 놨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낙랑군은 또, 평양이라고 하고 한사군은 이북 전역에다 그려놓는 웃지 못할 질엘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의 고대사 학자들은 삼국사기를 정사로 받들어 모시고, 삼국유사를 보조 사료로 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쓴 사서에는 정작 예국에 관한 기사가 드물다. 예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오히려 자세하게 나온다. 1,000년 후에 고려인이 쓴 사서보다 중국인이 당대에 쓴 사서가 보다 자세하고 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럼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밝힌 예국의 생활상을 들여다보자.
① 규모: 예의 호수는 2만으로, 인구 10만쯤 되는 것 같다. 부여의 호수가 8만이니, 부여보다 작고, 고구려의 3만과 엇비슷하며, 옥저 5,000에 비하면 큰 나라다.
② 읍락국가 체제: 대군장이 없고,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관직에 후侯·읍군·삼로가 있어 백성(하호)을 다스렸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며, 부끄러워할 줄 알아, 고구려에 구걸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은데 의복만은 조금 달랐다.
③ 책화(責禍)제도: 산천을 중시하여 산천으로 각각 부部를 나누었고, 서로 들어와 허튼 짓을 못하게 했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짖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갚아 도둑이 적다.
④ 족외혼: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고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서둘러 버리니 옛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짠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해의 풍년이 들지를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⑥ 무천(舞天):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 없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했다.
⑦ 호랑이 신앙: 범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 지낸다.
⑧) 전술: 창은 길이가 3장이나 되니 여러 사람이 함께 긴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⑨ 특산물: 낙랑단궁이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果下馬)가 나온다. 과하마는 높이가 석 자인데 타면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고 해서 ‘과하(果下)'라고 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국은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부족의 개념이 강했다. 산천을 경계로 한 일정 지역 내의 경작지는 읍락 공동 소유의 개념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탐욕이 없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무천과 같은 공동의 축제의식(매년 5월 5일 열리는 강릉 단오제도 예의 무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 분화가 덜 이뤄진 초기 공동체 사회로 파악된다.
과연 이 창해역사라는 창해역사는? 滄海는 과연, 강릉과 춘천이라고 삭주와 명주로 볼 수 있는가?
맥국정벌은 신라의 진흥왕조 거칠부에 의한 정벌로 기원후 556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삭주로, 그렴 예라는 곳은 맥국인데 이를 강릉의 역사로 보고 있는데 실제는 같은 곳으로 옥저/현토/임둔이 가섭원/분릉으로 현 강릉인데 이 예와 맥을 별도로 보나 실제는 예국이 고구려시대 맥국일 뿐으로 우수주-춘주로 춘천으로 이씨조선에서는 이를 춘추를 춘천으로 꼿아 넣은 곳입니다.
예국은 처음에 고조선에 복속돼 있다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원산, 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자 예국을 그 지배 하에 넣었다. 기원전 82년 임둔군을 폐하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을 요동으로 옮기면서 한은 한반도 동부지역에 예국과 옥저 지역 7개 현을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두었다. 동부도위의 치소(治所)는 예국의 불내성(不耐城)으로, 지금 함경남도 안변에 해당한다.
한은 서기 30년 동부도위마저 폐한 후 예국과 옥저를 낙랑군 관할로 남겼다. 낙랑군은 거수(渠帥)라 불리는 예국 부족장들을 현懸의 후侯, 즉 현후(縣侯)에 봉했다. 이때부터 예국의 현후들은 낙랑군의 간접 지배를 받으면서 읍락 내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했다.
예국은 2세기 말 한의 세력이 약화될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한다. 한이 멸망하고, 중국 중원에 위가 들어서자, 고구려와 위가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패권전쟁을 벌였고, 예국도 그 싸움에 휘말렸다.
서기 245년(고구려 동천왕 19년), 위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해 동천왕이 옥저로 피신할 때, 위의 예하에 있는 낙랑과 대방군이 예국을 침공했다.
“정시正始 6년(245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이 고개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不耐侯) 등은 읍을 들어 항복했다. 8년에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니, 불내(不耐)를 예왕으로 봉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킨(313년) 후 예국은 다시 고구려에 복속하게 됐다.
예국이 언제 멸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사부가 실직 군주(505년)에 이어 하슬라 군주(512년)에 임명되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신라의 지배력을 확고히 한 시점을 전후로 예족은 북한 지역으로 밀려나 동해안에서 소멸된 것으로 관측된다. 그 후 신라를 공격하는 말갈의 기사는 예족이 아닌, 진짜 말갈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시기에 예족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때 이사부는 국방장관 격인 병부령(兵部令)을 맡고 있었다.
“진흥왕 9년(548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했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0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예의 자리에 말갈을 대신 끼워 넣었지만, 6세기 중엽에 예인의 존재를 표현했다. 예족이 고구려 땅으로 건너가 복속하고, 전투 시 고구려군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국은 처음엔 한사군의 지배를 받다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나중엔 신라에 의해 영토의 대부분을 빼앗겼지만, 한반도 동해안에 적어도 500년 안팎의 긴 세월을 보내며 실재했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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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으로 이는 아슬라주로 "맥국" 예라는 곳이 아니고 예의 북쪽 옥저로 신라의 "명주"라는 곳입니다,즉 통일신라시대 삭주-명주로 맥국과 옥저의 정벌로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결코 약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를 하북성의 지역이면 구당서의 남북 2000리 동서 3100리의 동서는 산서성가 섬서성으로 봐야합니다 혹은 감숙성 등 내외몽고자치구로 봐야만 이갸기 되는 줄거리다.'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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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창해역사비 |
오랜 역사를 가진 예국이지만, 1500년이 지난 오늘날 예국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강릉시 홈페이지에는 ‘예국토성지’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예국은 철국(鐵國)으로도 불렸다. 이에 따르면 1915년에 ‘예국토성지(濊國土城址)’라고도 불리는 강릉 토성지가 발굴·조사됐는데, 총연장 2,800m, 누(壘)는 0.5~12m이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 편과 민무늬토기 편이 출토됐다. 예국토성지는 조선시대에 폐기됐는데, 예국의 소군장(小君長)인 후(侯)가 거처하는 성읍(城邑)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릉시 옥천동과 금학동에 걸쳐 있는 예국의 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강릉에는 또 고대 예국의 신화적 인물인 창해역사(滄海力士)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창해역사를 가장 자세히 기록한 자료는 조선시대 문신 홍만종(洪萬宗)이 쓴 순오지(旬五志)다.
예국의 노파가 시냇가에서 호박만한 알이 떠내려 오는 것을 주워 두었더니, 얼마 안 되어 알이 두 쪽 나며 남자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 얼굴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으며, 6세가 되자 키가 8척이나 되고 얼굴빛이 검어서 성인과 같았으므로 검을 ‘여(黎)’ 자를 성으로 삼고 이름은 용사(勇士)라 불렀다. 여용사가 예국의 호랑이를 퇴치하기도 하고, 만근이나 되는 종을 옮기는 등 괴력을 발휘하자 왕은 상객으로 대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곳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장량열전에는 장량이 동쪽을 보고 창해군의 역사를 얻었다 했으며, 그가 사용하던 쇠방망이가 무려 120근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창해역사가 장량과 함께 진시황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했다고 전한다.
<강릉관노가면극(江陵官奴假面劇)>에서는 장자마리가 장량(장자방)을 상징하고, 창해역사는 시시딱딱이로 형상화됐다고 한다. 강릉 지역에 전하는 구전설화에는 창해역사의 이름이 강중(剛中)이라 밝히고 있으며, 사후에 강릉의 성황신 가운데 육고기를 대접받는 장군신인 육성황신이 됐다고 한다. 강릉시는 1991년 옥천동에 ‘창해역사기적비’를 세우고 그의 신화적 행적을 기리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기록들 중에서 滄海라는 지명이 중국 천진시 아래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도 쉬쉬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맥족[穢貊族}이 濊지역에 들어와 살게 된 이후에 濊貊으로 또 말갈족까지 그리고 간도가 여진족? 으로 한반도가 쑥대밭이 되어서 정작 신라, 신한인은? 경상도 경주지역으로 가서 소리없이 살고 있으라는 이야기지요. 음...
우리는 우선 사방 3만리의 고조선의 강역중 신한조선은? 간도와 한반도로 강동주 그리고 沿海州까지로 이는 절대강역이라는 "신한조선' 삼한족의 신한조선 지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마한조선중 만주는 삼수로 눈수/속말수/흑수로 둘러싸인 곳이 속만주고 외만주는 흑수만주고 그 남쪽으로 "장백산/구월산 대흥안녕산맥의 지지로 "북방고토지역"은 만주로 "여진족과 말갈족"의 주 거주지입니다.
문제는 이 강동주는? 한반도는 조선열전, 흉노열전, 중국사서에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강역인데 우리만 이상하게 이씨 조선의 병신 미친선비들이 조선열전의 번한?조선-위만조선이야기를 신한조선 지지에 가져다가 그려놓고 질엘하다 똥튀겨서 더럽게 나라까지 잃은 병신 木子 백재짱쪽개들의 이야기로 범벅 똥오줌 범벅을 해놨습니다.
대부여[大夫餘]란 기원전 425년 ~ 기원전 238년까지의 수 188년 44대 구물단군에서 47대 고열가단군까지의 이야기가 삼국유사 등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위만조선으로 기원전 194년으로 이 "번한조선"은 "조선열전"이라는 사마천의 사기로 우선 "당시" 번한"- 위만조선 - 한사군[기원전 108년] - 이부[기원전 82년] 그리고 濊/동예의 이야기를 한 것으로 역사이야기의 중심으로 "한사군"의 위치는 "濊"하라는 滄海는 어디인가??
여수기[余守己] - 濊國의 제후로 "徐씨"의 시조설화
"여수기(余守己)"는 단군 때에 예(濊)국을 다스렸던 사람으로, 나중에 그 아홉 아들에게 자신의 땅을 나누어 살피게 했는데, 아주 좋은 정사를 펼쳐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잘 도와서, 칭송도 많이 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대관령 산신: 영동 지역으로 가는 관문인 대관령에서 지금까지도 이 지역을 관장하는 자로 무당들에게 숭배 받고 있는 그림 입니다. 이 그림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강릉 단오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서(徐)씨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어떻게 해서 서(徐)라는 성씨가 생겼냐는 유래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즉 여수기(余守己)가 사람들을 잘 다스리고, 인기도 얻었다고 해서, 한자 "여(余)"자에다가 부수 중인변을 붙인 글자 서(徐)씨를 성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19세기때 나온 "임하필기" 등에 이미 채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어느 정도 퍼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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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주/춘주는 고조선 왕검단군기부터 부루단군.. 게속해서 "滄海" 등으로 나오는 이야기로 중요한 료하의 변한촌의 이야기로 료하/황하의 북부로 이는 중국 하북성 천진남쪽의 지지입니다.
濊/東濊로 예는 "삭주"로 이는 고려의 우수주/춘주로 -춘천으로 "명주"는 옥저/가섭원/분릉으로 강릉인데 저렇게 함경남북도로 그려서 놨습니다, 낙랑군은 펴양으로 대동강을 열수/? 대방군이 낙랑군아래로 마한? 진한? 변한? 잘도 가져다 사방 4000리를 사방 400리에서 사방 1500리로 마한? 백제로. 뒤죽박죽 전혀 "一以貫之"의 논리가 전혀 없이 한반도에 꾸겨넣기작업으로 서지학적인 "실증"작업이 없습니다, 즉 지명이면 고대 지명등 어떠한 거점을 중심으로 살펴야 하는데 "료하"하면 황하인데도 전혀 이를 인정도 안하는 작태로 흥 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기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디 고구려의 아슬라주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윤내현 교수는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낙랑군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일대에 정착했다는 설을 주장한다.[4]
윤내현, 《고조선 연구》, 일지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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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조선-대부여까지의 한반도는? 三韓九州중 삼한으로는 "신한조선"이고 구주로 江東州로 주의 도읍은 樂浪忽로 "대동강변"을 이름한 것으로 나옵니다, 즉 현 고조선강역으로 말하는 지역은 '신한조선"지지로, 중국사서의 기원전 이야기에는 "한반도=강동주"는 나올 이유가 없는 전혀 답사하거나 들어올 지역이 아니다는 것을 우선 알아야 다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즉 間道는 고조선의 출생지로 신한조선의 중심강역으로 마한은 북방고토지역으로 "마한족"중 "여진과 말갈"로 마한조선으로 2개 족의 중심지고 "북방초원지역"에 내외몽고지역에 '거란족과 예맥족"이 있었다는 강역의 개념도가 먼저 있어야만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대부여의 중심강역은 "아사달주"로 아사달은 지명으로 구주중 1州로 고조선 2기 기원전 1285년 ~ 기원전 426년까지 아다살주의 "백악산"으로 현 료녕성 진산, 의무려산으로 비정하고 있는 곳으로 "홍산문화권"을 "아사달주"로 우리가 생각하는 "한반도"와는 전혀 다른 홍산문화권이 대부여의 수188년 "아사달주의 "장당경"시대는 백악산에서 "산서성 임분시"로 당요의 당장평이 아닌가 하는 산서성 내부지역으로 산서성 료주까지 들어가는 지역으로 전부 '강역개념"의 사고전환이 없이는 "동이=東方"의 중심이 "중국대륙의 東方은 寅方으로 이는 히말라야 파미르고원 天山의 자방에서 천축이라는 축방 그리고 인방으로 지구 360도중 30도씩 자-축 그리고 인방의 동방은 "인방"으로 그 인방지역을 "고조선"의 강역전체로 봐야만 이해가 가능하고 西夷라는 주무왕의 은나라 멸망은 서이족의 서백의 침략으로 동이지역의 붕괴를 가져오나, 전붕이 아니고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로 기원전 1122년 기묘년이후의 '주나라"의 문예부흥기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문화가 발흥하는 시기로 이를 모화하는 이들이 점진적으로 늘어나서 조선국은 대륙 동이지역에서 반도로 쫓겨나는 대수모기로 이 때 처음으로 료동과 간도까지 우리가 백두산정계비 청나라 되놈들의 개떡에 간도와 아사달 등 전부 청나라 병신들이 가져다 짱개에게 바친 개병신 되놈들로 목자병신과 되놈 건륭병신들의 개새끼 오줌싸기놀이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절대로 '간도"로 들어올 수 없었던 만주족 변발개새끼들이 들어와서 다 갖다 바치고 뒈진 병신족이 만주족 얼간이 병신들이 여진족으로 떨빵이들이다.
江陵 = 가섭원 분릉으로 "東扶餘"로 하슬라 아슬라로 예국 북부로 옥저로 불리고 임둔으로 남옥저로 불린 곳의 조선국의 이름 지명이다 즉 옥저/현토 아래 사방 1000리 아래 남옥저로 東扶餘/가섭원/분릉/차릉[江陵의 릉의 어원]으로 옥저중 남옥저 사방 800리로 "이를" 임둔으로 둔 언덕 둔으로 언덕 릉으로 강릉으로 전부 하북성 현토/옥저 남부 임둔/남옥저로 말하는 곳의 지명으로 조선시대 이 방원의 지시로 "江陵"으로 세종의 조선지리지 등에 설명이 전부 한반도 조선반도내로 몰아서 이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州/國급이 전부 1개 도시 고을로 내려앉은 1/10의 뻔데기 작명이 시작된 것은 조선국의 쫏썬의 속국시절로 이를 활용한다고 한 이이 병신도는 더 가관이다, 즉 낙랑군은 濊貊지역인데 이미 나온 이야기를 더해서 "낙랑군"으로 평양이요 하니 개떡 식민 똥강역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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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江陵)은 기원전부터 성읍국가인 예맥족(濊貊族)의 예국(濊國)이 있던 지역으로 127년 이후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하였다.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 불렸다. 550년(신라 진흥왕 11)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639년(선덕여왕 8) 2월에는 북소경(北小京)을 두었고, 658년(무열왕 5) 말갈족과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소경을 폐지하고 하서주(河西州)로 개편하여 도독을 두었다. 757년(경덕왕 16) 명주(溟州)로 개편하여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를 두었고 9군 25현을 관할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두었다. 그 후 우계(羽谿)·연곡(連谷)의 두 현을 두었다가, 1260년(원종 1) 공신 김홍취의 고향이라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389년(공양왕 1)에는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1789년(정조 12)에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강릉군으로 개칭하였다.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강릉읍·성덕면·경포면을 통폐합하여 강릉시로 승격하면서 명주군을 분리시켰다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강릉시로 통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