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보면은 세계의 모든 인류학자, 생물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 이 학자들에 의하면 결국 지구상에 사람들이 문화의 형태가 최초로 형성되었던 시기를 보통 1만년에서 1만 2천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길 수도 있고 더 짧을 수도 있겠지요.
근데 오늘 이 <천부경>을 얘기했을 때 <천부경>이 최초로 드러난 시대는 우리가 문헌적으로 봤을 때 지금으로부터 9000년 전입니다.
이미 우리 민족 역사는 지금부터 90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 민족 역사의 시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민족 문화는 어떤 것이냐?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죠? 형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 형상을 통하지 않고 우리들의 정신을 통해서 그대로 내려온 것이죠. 그러면 형상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우리 선조들의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축물이라든가 조각, 미술, 예술품. 굉장히 다양한 것들이 많죠. 그 다음에 무형적인 것으로는 여러 가지 풍습, 놀이 또 사상과 철학 같은 정신적인 면이겠죠?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형상을 갖고 있는 문화의 형태나 형상을 갖고 있지 않는 문화의 형태의 근원은 결국 정신에서부터 다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민족 문화의 흔적을 보고 더듬었을 때에 과연 그 민족문화의 원류가 어떠한 정신적인 차원에서 나왔겠는가 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었을 때 과연 그 민족이 갖고 있는 문화의 근본은 높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나왔는가 낮은 정신적인 차원에서 나왔는가를 알 수 있겠죠.
결 국 우리는 근본과 그 근본을 통해서 흘러 온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찾아서 검토하고 연구했을 때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문화의 흔적들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과연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는 언제부터, 얼마만큼 뛰어난 바탕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이제 <천부경> 원문 해석을 하기에 앞서 어떻게 해서 <천부경>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 앞에까지 나타날 수 있었던가?를 알아보겠습니다.
일단 우주 만물 가운데서 크게 둘로 나누면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죠? 물론 생명이 없는 것 가운데서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것이 많고, 생명이 있는 것 가운데서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그 종류는 다양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표현을 한다고 할 때 생명이 없는 것은 표현을 못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표현을 할 수 있단 말이에요.
표 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식물은 분명히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식물은 표현을 하지 못하는 거 아니냐?' 하는데 식물도 역시 간접적인 표현을 합니다. 표현방법이 아무래도 다양하고 능동적이지 못하죠.
예를 들어 칡이라든가 나팔꽃 또는 어떤 줄기 식물 같은 것은 자꾸 그 줄기가 뻗어나간단 말이에요. 뻗어나가면서 무엇을 자꾸 감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감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벌써 그 식물이 가지고 있는 간접적인 표현의 방법인 거예요.
결국 생명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점 점 점 윤회해 가지고서 자꾸 다양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생명체까지 올라가는데,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는 생명체일수록 표현의 방법이 역시 다양하다고 하는 거예요. 사람도 표현할 수 있는 기능이 있고 동물들도 있고 또 새들도 있고 물고기도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표현의 방법을 일단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고 하면 몸짓과 소리입니다.
아주 원시적인 방법이지요. 물론 동물이나 새들도 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사람도 지금부터 200만 년 전에는 동물과 똑같은 그런 표현방법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몸짓이나 소리를 통해서.....그런데 몸짓이나 소리를 통해서 표현하는 방법은 반드시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즉 뭐냐고 하면 몸짓으로 할 수 있는 표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에서만 전달이 가능하단 말이에요.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에게나 또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표현방법이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소리는 또 역시 소리 나름대로 한계가 있는 거예요. 뭐냐고 하면 소리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소리도 전달할 수 있는 거리가 한계이기 때문에 그 한계이내에서만 소리로 전달할 수 있는 거죠.
그 이상의 먼 거리에서는 표현을 전달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결국 몸짓과 소리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이 방법을 자꾸 스스로 발전을 시킨 거예요. 발전을 시키다 보니까 결국 몸짓으로서 최대한으로 발전시킨 게 뭐냐고 하면 수화(手話)입니다. 아마 말을 할 수 없는 농아들은 이 몸짓으로써 거의 의사전달을 다 합니다.
그런데 역시 그 수화를 통해서도 다 할 수 없는 거예요. 왜? 예를 들어서 어저께 저녁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5.18 기념행사를 했는데 전라남도 광주라는 표현은 몸짓으로써 수화로써 할 수 없잖아요.
그 리고 또 역시 색깔도 그래요. 뭐라고 할까....무지개색 이라든가 다른 어떤 색들도 역시 아무리 몸짓으로 표현을 해도, 그 몸짓을 통해서 무한히 발전된 수화라고 해도 표현의 완전한 형태는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역시 언제까지나 그 한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옛날 원시 사회에서의 사람들의 전달 방법은 지금의 동물처럼 몸짓이나 소리로써 거의 다 했습니다. 소리로써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단조롭단 말이에요. 즉, 불과 몇 종류의 표현 방법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짐승이라든가 새들 역시 자기네들은 소리로써 다 전달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로써 자기가 갖고 있는 어떤 마음의 표현을 다 할 수 있느냐고 하면 역시 다 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 뛰어난 두뇌를 통해서 당연히 자연스럽게 소리가 발달이 되지 않으면 안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위치에 도달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자꾸 소리로 전달하다 보니까 자기 마음의 표현은 계속 새롭게 더 다양하게 표출이 되지만 방법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까 굉장히 답답한 거예요.
그래서 이 답답함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좀 더 다양하게 표현을 시키기 위해서 발달이 된 게 ‘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말은 점 점 점 발달을 하게 돼요.
말이 발달된다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는 거예요. 즉 정신을 통해서 사고 의식이 광범위하게 더 느껴질수록 거기에 따르는 말도 상대적으로 점점 더 생겨난다는 것이죠.
그 렇게 해서 오랜 세월을 사람들이 살다 보니까 또 불편한 것을 느끼게 된 거예요. 어떤 불편함을 느끼게 된 거냐고 하면 벌써 오래 전에, 몇 달 전에 혹은 몇 년 전에 분명히 서로가 서로끼리 말을 하고 했던 것을 인간은 기억할 수 있는 장치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데 그 기억을 다 할 수가 없더란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