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강의는 단기4328년(서기1995년) 봄에 8주간 부산 전포동 「배달겨레 학당」에서 말씀하신 것을 녹취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나’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뻔한 것 아니예요?
‘나’라고 할 때, 어떻든 ‘나’라고 이름이 붙여졌잖아요? ‘나’라고 하는 것이 붙여졌을 때 이 흐름이 흐르다가 멈춤이 있다면 ‘나’라고 하는 실체(實體)가 있는 건데 사실 멈춤이 없이 계속 흐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실체는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이걸 잘 들여다봐야 돼요. “‘나’라고 할 것”, 그것이 실체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왜냐면 ‘한’과 시(時)와 공(空)을 함께 봤을 때 그걸 알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걸 알고 난 다음에는 또 바뀌어져요. 어떻게 바뀌어 지느냐? ‘나’라고 하는 실체가 분명히 있게 되어 버려요.
그렇지만 분명히 알기 전에는 그러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요. 왜? 알음알이 병에 걸릴 수 있으니까요.
‘본래부터 있는 흐름이 그 만물과 함께 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잠시도 머무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사실상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이치(理致)란 말이에요. 이 이치를 가지고서 ’한‘의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 계속 추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들어갔을 때는 그 전까지 알고 있던 그 이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려요. 그 때는 ’나‘라고 하는 것이 또렷하게 실존(實存)해버리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이....
단 뭐냐 하면 ‘나’라고 하는 것을 지워버린 상태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함께 해
있는 거예요. 공존(共存)하는 거예요.
<‘나’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과 <또렷이 있는 것> 그 두 가지가 동시(同時)에 공존해버려요. 그 공존할 수 있는 의미의 기본적인 원리가 <천부경(天符經)>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이 다섯 자(字) 안에 다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되.......아까처럼 잘못 판단해버리고 잘못 의미를 알아버렸을 때 앞으로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그 길목에 있어서 잘못 들어서게 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천부경(天符經)> 해설 서적이 지금 세상에 많이 나와 있지만 “‘한’-‘일(一)’-의 시작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드러났다.”는 식으로 거의 대부분 표현을 하는데 혹시 지금까지 이러한 무극론(無極論)적인 그러한 생각을 가지셨다면 이 순간부터 완전히 지워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공부를 해서는 발전이 없어요.
불교에서 애기하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이런 식으로 갖다 붙여 얘기한다면 큰일 나지요. 왜냐하면 기본의 틀이 바뀌어지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확연하게 드러날 수는 없단 말이에요.
오늘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다섯 자를 가지고 기본 틀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얘기한 내용 가운데 잘 이해 안 가거나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침묵)
혹 더러 이런 부분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다음에 ‘석삼극(析三極)’이 나와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析三極) 무진본(無盡本)’ 이렇게 이어지는데........
점(點)을 찍기를 ‘일시무시(一始無始)’ 다음에 찍고, ‘일시무시(一始無始) 일석삼극(一析三極) 무진본(無盡本)’ 이렇게 푸는 사람도 있어요. 크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 뒤의 ‘일(一)’을 빼버리고 ‘일시무시(一始無始)’만을 풀게 되면 “‘한’은 시작이나 그 시작은 없다.”가 됩니다. 이것을 “‘한’의 시작은....”으로 풀면 안 된다는 것도 이야기 했습니다.
‘일시무시(一始無始)’에서 ‘일(一)’ 자를 집어넣어서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하게 되면 “‘한’은 비롯이나 ‘한’의 비롯은 없다.”가 됩니다. 이것이 사실상 맞는 얘기예요. 법(法) 상으로....
만약에 이 ‘일(一)’ 자를 앞에서 빼고 뒤에 붙여 ‘일석삼극(一析三極)’이 된다고 합시다. ‘석삼극(析三極)’의 뜻은 ‘근본이 세 갈래로 나뉘어 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석삼극(析三極)’ 앞에 ‘일(一)’ 자를 붙이지 않아도 반드시 그 이론은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는 다섯 자로 끊었느냐 하면........... <천부경(天符經)> 맨 마지막에 보면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이것도 다섯 자입니다. ‘일종무종(一終無終)’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란 말이에요.
<천부경(天符經)>의 시작과 끝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인데 같은 의미인 거예요. ‘한’(근본, 진리)‘은 모든 만법의 근원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나 그것이 나온 어떤 시작은 없다는 의미예요.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함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도 ‘일(一)’ 자를 여기에 붙인 거예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고 했을 때 ‘석삼극(一析三極)’ 앞에 굳이 ‘일(一)’ 자를 붙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문맥의 흐름 상 ‘석삼극(析三極)’이라고 해도 다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앞으로 이제 내용이 조금씩 깊어질 겁니다. 어쩌면 오늘 얘기한 내용을 다 소화시키질 못할 거예요. 회원님들의 이해 수준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게 내용의 깊이도 사실 한계를 가지긴 합니다.
별 의문 나는 게 없어요?
그럼 다음 주로 넘기고 오늘은 이만........
[3일 째 <천부경(天符經)>강의 끝]
[ 4일 째 <천부경(天符經)>강의 시작]
숙제를 내주었는데 집에 가셔서 <천부경(天符經)> 한번 씩 써 봤어요? 끝까지......... 지난번에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까지 했을 겁니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일체는 ‘한’으로부터 시작하나 ‘한’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은 ‘석삼극(析三極) 무진본(無盡本)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
이게 전부 이어진 문장입니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다음의 ‘석삼극(析三極)’은 ‘나누면 셋으로 나누어진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나누면 셋으로 나누어지느냐? 하면 ‘일(一)’입니다. ‘일(一)’의 자리는 ‘한’이라고 그랬죠? ‘석삼극(析三極)’은 ‘한’을 나누면 셋으로 나누어진다는 뜻이에요.
‘무진본(無盡本)’은 ‘나누어지는데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한’입니다.
그 다음에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