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 종사님의 천 부 경 강 의(20)
- 이 강의는 단기4328년(서기1995년) 봄에 8주간
부산 전포동 「배달겨레 학당」에서 말씀하신 것을 녹취한 것입니다.-
즉 아무 극(極)이 없는 상태가 태극(太極)입니다. 좀 더 가까운 표현을 쓰다보니까 무극(無極)이라고 하는 겁니다. 태극(太極)과 무극(無極)이 따로따로 있거나 연결하여 이어져 내려온 거 아닙니다.
극(極)이 없는 상태라 해서 아무것도 없는 무(無) 인 것은 또 아니지요. 그냥 꽉 차 있어요. 꽉 차 있다는 것은 상대가 없다는 거예요.
유(有)니 무(無)니 하는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단, 존재한다는 말 말고서는 달리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우주가 온통 빨강색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우주는 빨강색이 아닌 것이죠. 상대될 수 있는 다른 색(色)은 하나도 없으니 빨강색이되 색이 아닌 것이죠.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나올 수가 없어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약 이 우주 안에 나온 것이 단 한 개라도 있다고 하면 말 해봐요. 없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나와요?
그러면 모든 것은 이 ‘한’으로부터 나왔는데 이 ‘한’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한’은 스스로 본래부터 있는 것이지 어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알겠죠?
(일어서셔서 칠판을 가리키며....)
자 그러면 정리를 해보죠. 점(點)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했지요?
①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이렇게 점을 찍어 읽으면 “‘한(一)’의 시작은 무(無)에서 시작한다.”가 됩니다. 지금까지 계속 설명해 왔지만 이 내용은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②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한(太極)’은 무극(無極)에서 시작되었다.”다시 말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의 일(一)은 태극으로, 무(無)는 무극(無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역시 제가 지금까지 계속 설명해왔지만 태극과 무극은 하나라고 했기 때문에 이 뜻풀이도 틀린 얘기이지요.
③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이것은 “‘한(一)’의 시작은 없지만 ‘한(一)’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의 내용은 사실상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법상으로 보았을 때 먼저 표현할 것이 있고 나중에 표현할 게 있듯이 문장의 내용을 완벽하게 갖추어 전달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볼 때 존재와 비존재로 대비되었을 때 존재가 먼저 비존재가 나중이 되겠지요.
어쩌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한 생각 차이이겠지만 어감으로 보아서 물 흐르듯이 매끄럽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중원 대륙에 있었던 당(唐)나라 시대에 선가(禪家)에 뛰어난 인물이 하나 있었어요. 그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입에 많이 오르내리곤 합니다. 누구냐고 하면 ‘조주(趙州)’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이 조주라고 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고 하면 무(無) 자(字) 화두가 있습니다. 왜 무(無) 또는 무(無) 자(字) 화두라고 하는 내용이 조주라고 하는 그 사람과 연관시켜서 많이 나오잖아요.
이 조주라고 하는 사람이 산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죠.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그러는 가운데 전국에서 소위 공부하려고 또는 공부 좀 했다고 하는 사람이 전부 모여드는 거예요.
모여들었을 때, 어느 한 날에 한 수좌가 이 양반에게 와서 묻습니다. 무엇을 묻느냐 하면?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묻는단 말이에요. 처음에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무(無)! 그래 버린 거예요.
그 다음에 다시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되었을 때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유(有)! 그래 버린 거예요.
두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한 거예요.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無)라고 대답해줬는데 다음 사람이 와서 또 물었단 말이에요. 역시 마찬가지로 대답해줬는데 그때는 유(有)라고 한 거예요.
똑같은 질문인데도 한사람에게는 무(無), 한사람에게는 유(有)라고 했단 말이에요. 결국 뭐냐 하면 그 두 사람이 조주한테 물었을 때는 개라는 것도 알고 불성이라는 것도 알고 그런 거란 말이에요.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은 ‘한’과 같은 거예요. 즉 부처님께서 분명히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불성이 있는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해놓으셨으니 그 밑에 후학(後學)들이 공부를 하면서 그 말씀에 대해서 부정(否定)할 수는 없는 거예요. 왜? 자기네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스승이니까......사실이 또 맞고........ 모든 만물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을 가진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불성(佛性)-한, 삼신(三神)-이 없는 만물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조주한테 그 사람이 묻기를 어떤 의도를 갖고서 물었을 게 아닙니까?
뭐냐 하면, "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그 의도를 가지고 물은 거예요. 그러니까 조주는 저 친구가 어떠한 의도를 갖고서 나한테 물었나 하는 것을 간파한 거죠.
그 친구가 묻는 의도가 “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을 때 조주가 무(無) 해버린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친구가 “개도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그러니까 유(有)해버린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진리를 깨닫는 것과 성불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했을 때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한 친구는 분명히 모든 만물은 성불할 수 있다는 그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알고 물은 거고, 또 한 친구는 모르고 물었다는 거예요.
왜? 사실 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근데 부처님께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을 가진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냐고 하면, ‘부처가 될 수 가 있다’는 말은 ‘성불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여기에서 유(有)와 무(無)의 상대적 의미가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성불(成佛)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존재가 자기 가치(價値)를 다했을 때, 구현을 했을 때 그게 성불입니다. 지금 제가 칠판에 이걸-매직펜- 가지고 글씨를 썼잖아요? 이 매직펜으로 글씨를 쓰는 순간 이 매직펜은 성불하는 거예요...............
즉 이 매직펜도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이 매직펜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우주 만물 가운데 깨달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이지만, 존재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모든 만물이 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볼 때는 우리가 길을 가면서, 산을 타면서 보이는 모든 만물이 그냥 부처인 거예요.
부처로 보여요. 다 성불되어 있다는 거라. 이 방 안에 있는 시계도 성불되어 있고, 마이크도 성불되어 있고, 책상도 성불되어 있고, 칠판도 성불되어 있고, 전부 다 성불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처처불(處處佛)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똑같이 물었을 때 근기에 맞게끔 상대적으로 조주께서는 유(有)와 무(無)의 개념을 그네들에게 가르쳐준 거예요. 유(有)에 집착했을 때는 무(無)로 때려 부수고 무(無)에 집착했을 때는 유(有)로써 때려 부숴 버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