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 종사님의 천 부 경 강 의(19)
- 이 강의는 단기4328년(서기1995년) 봄에 8주간
부산 전포동 학당에서 말씀하신 것을 녹취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분명히 사용하고, 말이 있을 지언데 우리나라 사람도 진리를 깨달았을 때 역시 그 진리에다가 가상적으로 이름을 붙였더라는 거예요. 그 붙인 이름이 ‘한’입니다.
한국 사람은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일단 알고 짚고 넘어가야 되고 또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지난 날에 진리를 깨닫고 이름하여 ‘한’이라고 이름 붙이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진리에다 붙인 그 여러 가지 이름을 다 아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붙인 이름을 모르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앞으로 이 ‘한’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와 ‘한’에다 붙인 그 뜻은 여기에 있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사용하게 될 거예요.
여기에 나와 있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할 때, ‘일시무시일’ 이 다섯 자가 갖고 있는 의미의 ‘일(一)’을 표현할 때는 다른 게 아니라 ‘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一)’과 ‘한’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뜻인 거예요.
그리고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할 때, 가운데에 무(無)라는 게 있습니다. 이 무(無)를 어떻게 해석들을 하냐고 하면 여기에 하나의 표본이 있는데.....
‘하나(一)의 시작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해석해놓았어요.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자리가 ‘한’의 자리인데 이 ‘한’이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되었다는 거예요. 이 무(無)를 ‘한’이 시작되는 곳으로 해석해놓은 거죠.
그러면 이 무(無)가 뭐냐? 무(無)는 어디까지나 상대(相對)입니다. 유(有)와 무(無)의 상대인 거예요. 그리고 상대(相對)는 현상(現象)과 정신의 의식 세계를 통해서 표현된 거란 말이에요.
여기에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이것을 사과라고 할 때에 이 사과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통 털어서 사과라고 합니다. 그렇죠?
어느 한 부분을 가지고서 사과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통 털어서 사과라고 합니다. 즉 이 사과가 가지고 있는 질량 전체를 사과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사과라는 이름을 인간이 가정(假定)으로 붙였지만 가정으로 붙인 그 이름이 사실은 그대로 또 진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과를 깎아서 한 귀퉁이를 이만큼 자른 뒤 여기에 놓았다고 합시다. 역시 이것도 사과라고 하는 거예요. 또 이 사과를 믹서에 넣고 갈아서 그냥 꽃밭에 뿌렸다고 했을 때 그 꽃밭에 사과는 있는 거예요. 그렇죠?
우리가 늘 볼 수 있는 사과의 모양은 없어졌지만 사과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의미는 꽃밭에 이미 뿌려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표현하기를 ‘그 꽃밭에는 사과가 없다.’고 그래요. 이게 관념의 차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나란 무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많이들 고민한단 말이에요. 도대체 나란 무언가? 하며....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얘기하고 생각하는 ‘나’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 육신(肉身)이 태어나서 꾸준히 살아오면서 형성된 거예요.
살아온 그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이미 자기도 모르게 ‘나’라고 하는 것이 관념적으로 인식이 되어 온 거예요. 인식되어 온 관념적인 ‘나’를 많은 사람들은 전부 ‘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은 모양에 집착하니까요.
그러나 모양이 없는 또 하나의 ‘나’가 있는 거예요. 바로 그 모양이 없는 ‘나’가 진짜이고, 여러분들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 있는 ‘나’는 사실 가짜인 거예요. 가짜를 진짜처럼 알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근데 묘한 게 있어요. 가짜를 가짜라고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그 가짜가 진짜(?)로 되어버리는 거예요.
가짜인 진짜(?), 진짜인 가짜(?).
가짜와 진짜가 따로 없는 거예요.
역할 분담일 뿐이지. 단, 가짜를 통해서만이 진짜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좀 헷갈리죠?
이 사과도 마찬가지예요. 사과의 모양을 갖고 있을 때 사과라고 할 수 있지 모양이 바뀌어졌을 때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관념인거죠. 마찬가지로 사과의 모양이 없어졌을 때 사과가 없다고 그래요. 이것을 무(無)라고 해요. 근데 사과가 없는 게 아니잖아요? 어딘가에는 있잖아요? 자기 눈에는 안 보이지만....
그냥 쉽게 이야기해서 여기에 사과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서 창밖으로 던져버렸단 말이에요. 여기에는 사과가 없어요. 없으니까 무(無)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과가 여기에 없을 뿐이지 창밖에는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이 무(無)라고 하는 것은 실체(實體)가 없다는 거예요. 실체가 없어요. 전부 상대적인 현상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일 뿐인 거예요. 물질로 나타난 현상이든가 의식 속에서 나타난 현상일 뿐 실체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천부경(天符經)>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착각하느냐고 하면, 이 진리(眞理)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나왔다고 그럽니다.
“이 우주 공간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진리가 나왔다”는 것은 “‘한’의 시작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이다”라고 하는 거와 같은 말이에요.
이렇게 잘못 생각하면 엄청난 혼동을 불러일으켜요. 그러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벌어져요.
지난번에 <주역(周易)> 강의하면서 이야기했지만, (일어나셔서 칠판에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쓰신 뒤) 역경(易經)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은 ‘한’과 같은 거라고 했어요. ‘한’은 태극이에요.
그리고 이 ‘한’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냥 본래부터 있었다고 했죠? 결국 모든 만물은 일(一)을 통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모든 만물이 생겨날 수 있는 가장 근본이 일(一)인데, 이 근본의 자리와 태극은 같은 거예요. 같은데도 불구하고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을 “‘한’의 시작은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라고 해석한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합리화시키냐고 하면......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송(宋)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머리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흔히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로 번역-이라는 이 구절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즉 태극이 근본 자리인데도 이 태극(太極)이 무극에서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태극이 무극에서 나왔다”는 얘기나 “진리인 ‘한’은 무(無)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똑같은 얘기인 거예요.
지금 이 이론을 가지고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도 경(經)을 번역하고 책을 내는 사람들인데.......이것은 그야말로 봉사가 더듬는 거와 같아요.
이것 가지고 도형(圖形)-일례로 이퇴계(李退溪)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제일태극도(第一太極圖)-까지 그려놔요.
어떻게 그리느냐고 하면.....
(칠판에 도형을 그려놓으시고..)
○ → ● → ◑
무극(無極) 태극(太極) 음양(陰陽)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우주의 근본은 이 자리-태극(太極)-인데, 벌써 이 근본이라는 것은 ‘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있다’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 ‘있다’고 하는 것 이 자체는 아무 것도 없는 순수한 무극(無極)의 상태에서 나왔다.”
이런 주장을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들은 이 이론들이 그럴듯해집니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무극(無極)은 극(極)이 없는 것이에요. 지극함이라고 하는 이 극(極)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가운데의 ‘이(而)’ 자(字)는 ‘~한 것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은 ‘무극한 것이 그냥 태극이다’는 뜻이에요.
즉 ‘아무 것도 극이 없는 것이 태극이다’는 말이에요. 사실 태극의 자리는 아무 것도 극이 없어요. 아무 것도.....본래부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나올 수가 없어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나와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약에 이 우주 간에 나온 것이 단 한 개라도 있다고 하면 말 해봐요. 없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것은 이 ‘한’으로부터 나왔는데 이 ‘한’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한’은 스스로 본래부터 있는 것이지 어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 이치를 알아야 됩니다. 알겠죠?
(일어서셔서 칠판을 가리키며....)
자 그러면 정리를 해보죠. 첫 번째, 이것-무극(無極)-과 이것-태극(太極)-은 같은 것이에요. 같은 것인데, 이것-“하나(一)의 시작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시작한다.” -은 이치에 하나도 맞지 않다고 했죠?
두 번째는 “하나의 시작은 태극(太極)이며, 태극은 무(無)의 근본인 무극(無極)으로부터 시작이다.”인데 이것도 틀린 얘기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한’의 시작은 없으며, 모든 것은 ‘한’으로부터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이것은 사실상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법상으로 봤을 때 완전한 문법이 아니란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 생각 차이라고 하는 겁니다.
당나라 시대에 선가(禪家)에 그야말로 뛰어난 인물이 하나 있었어요. 그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많이 입에 오르내리고 합니다. 누구냐고 하면 조주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이 조주라고 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뭐냐고 하면 무(無) 자(字) 화두가 있습니다. 왜 무(無), 무(無) 자(字)라고 하는 내용이 조주라고 하는 그 사람과 연관시켜서 많이 나오느냐고 하면........이 조주라고 하는 사람이 산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죠.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그 중에서 전국에서 소위 공부하려고 또는 공부 좀 했다고 하는 사람이 전부 모여드는 거예요. 모여들었을 때, 어느 한 날에 한 사람이 이 양반에게 와서 묻습니다. 무엇을 묻느냐 하면?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묻는단 말이에요. 처음에 뭐라고 그랬냐고 하면, 무(無)! 그래 버린 거예요.
그 다음에 다시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똑같은 질문을 했단 말이에요. 그렇게 되었을 때 뭐라고 그랬냐고 하면, 유(有)! 그래 버린 거예요.
두 사람이 똑같은 질문을 한 거예요.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無)라고 대답해줬는데 다음 사람이 와서 또 물었단 말이에요. 역시 마찬가지로 대답해줬는데 그때는 유(有)라고 한 거예요.
똑같은 질문인데도 한사람에게는 무(無), 한사람에게는 유(有)라고 했단 말이에요. 결국 뭐냐고 하면 그 두 사람이 조주한테 물었을 때는 개라는 것도 알고 불성이라는 것도 알고 그런 거란 말이에요. 그럼 여기서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은 ‘한’과 같은 거예요. 즉 부처님께서 분명히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불성이 있는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이렇게 분명히 말씀해놓으셨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되었을 때 그 밑에서 후학(後學)들이 공부를 하면서 그 말씀에 대해서 부정(否定)을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왜? 자기네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스승이니까......사실이 또 맞고....
모든 만물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을 가진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조주한테 그 사람이 묻기를 어떤 의도를 갖고서 물었단 말이에요. 뭐냐고 하면, 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그 의도를 가지고 물은 거예요. 그러니까 조주는 저 친구가 어떠한 의도를 갖고서 나한테 물었나 하는 것을 간파한 거죠. 그 친구가 묻는 의도가 “개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했을 때 조주가 무(無) 해버린 거예요. 그 다음에 또 한 친구가 “개도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그러니까 유(有)해버린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진리를 깨닫는 것과 성불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느냐? 했을 때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한 친구는 분명히 모든 만물은 성불할 수 있다는 그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알고 물은 거고, 또 한 친구는 모르고 물었다는 거예요.
왜? 사실 개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는 거예요.
근데 왜 부처님께서는 “모든 만물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고, 그 불성을 가진 모든 만물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셨냐고 하면, ‘부처가 될 수 가 있다’는 말은 ‘성불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했을 때 여기에서 유(有)와 무(無)의 상대적 의미가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 자연문화회 신불사 _ 313131kkok@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