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이곳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불편하다고 느낄 때, 자꾸 더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이건 인간의 본능적인 삶의 욕망인 거예요.
특히 유목민들의 생활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지금부터 6000년 전 쯤 되겠지요.
그리하여 각기 나름대로 이 생각 저 생각 하여 의논한 끝에 우두머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머나 먼 초원을 찾아 역사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죠.
그 중 일부는 천산산맥을 넘고 다시 알타이산맥을 또 넘고 바이칼 호수에 정착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만족하지 못해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로 이동한 뒤 지금의 인디언들의 조상이 된 것이죠.
또 일부는 천산산맥을 넘어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발하슈호 근처와 카자흐스탄 쪽으로 가고 그리고 한 집단들은 파미르 고원을 지나 일부는 흰두쿠시산맥을 넘어 지금의 인도와 파키스탄 쪽으로 갈라지고 모험을 좋아하는 대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터키 쪽으로 끝없이 끝없이 가는 거예요.
그 중 한웅을 따르는 무리들은 천산 산맥에서 동남쪽으로 쭈욱 내려와 지금의 중국 섬서성 태백산에 정착을 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보면 옛날에 단군 왕검은 단군 조선의 시조이죠.
단군 조선 이전의 나라가 ‘배달나라’이며 배달나라 이전의 나라가 ‘한나라’란 말이에요.
그러나 일부 지금 사학자들은 단군 조선은 한나라 천제 시대의 배달나라가 시베리아와 바이칼호를 지나 지금의 백두산으로 이동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해요.
그런데 보면 역사의 확실한 흔적을 살펴볼 때에 어떤 것을 볼 수 있냐고 하면은 (지도를 가리키시면서) 지금 여기가 중국 산동반도(山東半島)입니다.
이 산동반도를 통해서 황하강이 흐르고 황하강이 이 쪽 천진(天津) 쪽으로 빠지고 그 다음에 양자강이 상해로 흐릅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으로 여기고 있어요.
물론 백두산을 태백산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클 태(太) 자 흰 백(白) 자이니.....
백두산을 또 다른 이름으로 백산, 장백산이라고도 하지요.
근데 <삼국유사>에는 태백산을 묘향산(妙香山)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묘향산 하고는 너무 거리가 먼 거고.....
여기에서 한나라 말엽에 위대한 젊은 성자(聖子)-한웅천황-가 나타나 이미 진리를 깨닫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가르켰어요.
가르켰다고 하는 것은 이미 <천부경>의 원리를 가르켰다고 볼 수 있겠지요.
<다시 지도를 가리키며>
계속 이 쪽으로 이동하죠. 동남쪽으로.....
그렇게 할 때 이 부분이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입니다.
돈황을 지나서 이 부분에 정착을 해요.
여기가 뭐냐면 태백산입니다.
현재의 중국 지도를 보면 태백산이 뚜렷해요. 높이가 3786m. 거의 4000m 다 되죠.
이 때에 한웅천황께서 자기를 따르는 삼천단부의 무리들 - 3000 단부라고 하면 3000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공부하는 집단(삼천집단)이 될 수도 있고....3000가족이라고 합시다 -을 이끌고서 동남쪽으로 계속 흘러 흘러 지금 이야기하고있는 실크로드(silkroad)를 타고 태백산에 정착합니다.
그러면 태백산 산꼭대기에 정착하느냐?
아닙니다.
태백산 밑의 이 지역 -지금의 서안(西安)-에 정착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태백산에 올라가 천지신명께 천제(天祭)를 지내죠.
천제를 지내고 비로소 여기서 -서안- 나라를 세우는 거예요.
이 나라가 배달 나라예요.
근데 배달 나라가 1565년 간 지속이 되었는데 14대 자오지 천황 -치우천황이라고도 하지요- 때 나라 도읍을 이동합니다.
지금의 산동반도로.......
그러면 이동을 하기 전까지 태백산 밑의 수도는 어디냐 하면 지금의 서안(西安)입니다. 중국말로는 시안이라고 하지요. 주나라 때는 서경(西京)이라고 표현하고 또는 서경부(西京府)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이 지역이 어떤 지역이냐 하면 배달 나라 시대에 이미 어마어마한 터를 다 일구어 놓은 것이죠. 터전을 다 닦아놓은 이후에 일구어 놓은 그 흔적들이 너무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수(隋)나라, 당(唐)나라 전부 여기에 수도를 정했어요. 이 서경에, 이 서안에.......
수나라, 당나라 때는 장안(長安)이라고 그랬답니다.
음......한 20년 전에 여기서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발견했죠. 발굴해가지고 황릉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나왔는 거라.
그 진시황전(秦始皇展)을 부산 수영만 요트 경기장 옆에서 했었지요. 우리도 직접 진시황릉 유물전시전에 가봤습니다.
그렇다면 진시황릉 안에 있는 그 유물들. 뭐라고 할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기능으로서 만들었는데 전차(戰車)라든가 호위병(護衛兵). 모든 군대의 조직을 이 능 안에 실존 인물과 또같이 만들어 놓았는 거라.
근 데 사실 그것을 만든 그 장인들은 우리 민족의 후예(後裔)들이예요. 즉 배달 나라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살면서 나라를 건국하고 엄청난 문화 업적을 축적해왔던 것이죠. 진나라 때는 뭐예요. 주나라가 망하고 나서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통일한 때, 이 시대에는 거의 우리 민족의 자손들이 전부 다 살았던 때 잖아요.
진시황전을 볼 때 아닌 게 아니라 가슴이 뭉클해지데요. 직접 거기서 발견된 그 실물들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보고 나서 우리 민족의, 배달 나라 후손들의 그 기능, 그 기능들에 녹아있는 숨결이 저 속에 다 담겨 있구나 하고 느꼈을 때 감개가 무량하더군요.
(지도상의 서안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도읍을 정하고 있다가 14대 자오지 천황 그러니까 치우 천황 때 장소를 산동 반도로 옮깁니다. 옮기고 나서 나라 이름을 <청구국(靑丘國)> 또는 <구려>라고 했었지요.
그러면 왜 하필이면 이 좋은 서안에 그대로 살지 그리로 갔느냐고 하면......
지금의 서안 일대는 지형적으로나 풍수적으로 사람이 살기가 너무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 런데 왜 하필이면 한 천년간 이 서안에서 나라를 이끌다가 산동반도의 청구국으로 옮겼냐고 하면, 이 때 쯤 해서 -배달 나라 세우고 천년이 지나고 나서- 배달 나라 변방의 사람들이 세력을 키워가지고서 자꾸자꾸 침범하기 시작한 때문이에요. 소위 밑에, 변방에 있는
(다시 지도를 가리키시면서)
여기죠.
곤륜산 지역에 있는 소위 화산족 - 지금 얘기하고 있는 중국 한족(漢族)의 조상에 가까운 사람들 - 들이 전쟁을 하려고 굉장히 침범한거예요.
이 때에 전쟁을 하려고 하면 무엇이 필요하냐? 그 당시는 철기(鐵器) 문화가 아직 발달되기 이전이죠. 이 때 철기 문화가 막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작이 될 무렵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