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 백공종사님의 천부경 강의(40)
- 이 강의는 단기4328년(서기1995년) 봄에 8주간
부산 전포동 <배달겨레학당>에서 말씀하신 것을 녹취한 것입니다.
이렇게 육(六)의 뜻을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를 통틀어서 걸리는대로 만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육(六)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비유와 방편들 아니겠어요?
어디까지나 대삼합육(大三合六)의 근본을 알아야겠지요.
자 이제 한 10분간만 눈을 지그시 뜨고 명상에 잠겨봅시다. 눈동자의 초점은 바라보는 곳 없이 허공에 던져만 놓고요.
의식은 아랫배에 두고 숨은 고요하고 천천히 깊게 그리고 마음은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
앞으로 천부경에 대해서 얘기하는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기 때문에 정신 바짝차리고 들어야 될 겁니다.
앞으로 4주 동안이라는 기간을 계획하고 있지만 상황을 보아가면서 좀 더 날자가 연장될지도 모르겠구요.
지금가지 우리가 그동안 천부경에 대해서 공부했던 것은 제가 누누이 이야기 했지만 삼신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얘기했지요?
성경을 읽어보면 구약전서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오는 구절이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는 다름 아닌 우주창조에 관한 내용들이 비유법과 상징론으로 잘 표현되어 있거든요.
모든 창조의 과정을 역시 6이 라는 숫자로 구성하면서 첫째 날, 둘째 날 이렇게 맨 마지막 여섯째 날 사람이 만들어진 내용들이 나오잖아요. 여기서 첫째 날, 둘째 날 하는 날자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날자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하루하루가 수천만 년, 수억 년이 될 수도 있는거예요. 그런데 첫째 날 첫마디가 어떻게 씌어있는지 아세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 첫 구절을 마음속 깊이 한번 새겨보세요. 여기서 태초라고 하는 것은 천부경에서 ‘일시무시일’과 똑같은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또한 지금까지 제가 쭈∼욱 얘기해온 삼신하느님의 마음작용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구절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우주와 태양계가 실제로 드러나는 현상을 차례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 제가 지금 성경의 한 부분을 인용하느냐 하면 우리가 오늘까지 천부경에 대해 공부한 모든 내용 들이 ‘하나님의 말씀’ 즉 삼신하느님의 마음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단 한 줄로 씌어져 있지만 천부경에서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절도있게 뼈대를 잘 추려져 있잖아요.
그렇지만 앞으로 우리가 공부해야할 마흔 자(40글 자)의 내용들은 실제로 드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직접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니 얼마나 복잡하고 오묘하고 참된 것인지 모릅니다. 보태서 이야기한다면 육(六) 이전의 마흔 자(40 글자)는 삼신하느님의 순수한 마음작용인 모양없는 신(神)들의 세계에서 나타난 현상들이며 육(六) 이후 마흔 자(40글자)는 삼신하느님의 순수한 마음작용으로 인하여 실제로 드러난 모양있는 것으로 기운(氣)과 몸(身)의 세계인 것이예요.
그렇다면 과연 마흔 자와 마흔 자 사이에 있는 육(六)이라는 글자의 깊은 의미는 무엇이냐는 거예요. 지난 번 얘기할 때 간접적으로 많은 것들을 인용하면서 접근시켜려고 제가 무던히도 애쓴 기억이 납니다.
육(六)은 다른 게 아니라 다리 역할 하는거예요. 육(六)은 전(前) 마흔 자 속에도 있고 후(後) 마흔 자 속에도 있습니다.
당연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전(前)과 후(後)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이니까요. 놓아주는 다리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성립되지 않고 사실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육(六)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 전혀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육(六)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우리들의 현 실 문제로 포장을 시켜 다루어 볼까요.
육(六)은 현재입니다. 육(六)이전의 마흔 자는 과거이며 육(六)이후의 마흔 자는 미래가 되겠지요?
육(六)이 현재라면 현재와 과거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할도 또한 육(六)이며, 육(六)이 현재라면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 역시 육(六)인 것만큼은 틀림없잖아요.
분명히 제가 조금 전에 얘기했지요. 육(六)은 전(前) 마흔 자 속에도 있고 후(後) 마흔 자속에도 있다고 깊이 탐구해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육(六)인 현재는 과거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는 얘기가 되네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뭐입니까? 시간(時間)이라고 하는 단위가 주어져야만 성립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시간이라고 하는 게 어디 따로 있어요? 흐름이라고 하는 상태를 틀로 묶어서 정의를 내리는 것뿐이잖아요. 흐름이 어디 정의가 있습니까.
그냥 하염없이 흘러갈 뿐인거예요. 찰나의 멈춤도 없이 말입니다.
그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그저 그냥 제멋대로 인거예요. 뒤죽박죽 질서가 전혀 없는 것처럼 흐를 때도 있고 원으로, 타원으로, 직선으로, 곡선으로, 위로, 아래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음대로 인거예요. 단, 상대적이라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흐름이 찰나의 멈춤도 없으니 결국 현재라고 하는 게 없네요. 현재가 없으니 과거도 없고 현재가 없으니 미래도 당연히 없는거 아니예요?
지금 여기 학당에 있는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거의 없을 것이예요.
우리 어렸을 때, 어쩌다 그런 물건들이 어떻게 흘러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길게 늘어진 영화 필름을 토막토막 내어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본 기억이 있어요. 그 필름 속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을 보면 거의 비슷해 별반 다른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분명 다르게 보이지 않는 한 장면과 다음 장면 사이에도 수없이 많은 다른 장면들의 사진들을 만들어 볼 수 있겠지요, 끝내는 찾지도 못하겠지만요.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쪼갠 끝에 최소의 미립자로 된 ‘쿼크’를 찾아내고 요즘 최첨단으로 말하는 ‘나노과학’처럼 말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들은 단 ‘한 모습’도 머무름이 있어 자기 모습이 없다는 것이예요. 아, 흐름이 잠시의 한 찰나라도 머무름이 있어야 각자 자기라고 하는 실체가 있을 것 아닙니까?
모두가 착각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 세상이 온통 모습 없는 찰나찰나의 점(ㆍ)으로 되어 있는 것을 시간이라고 하는 속도로 연결시켜 영화를 보고 착각하고 T.V를 보며 착각을 하고 또 한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보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야구장에서 투수가 포수를 향해 있는 힘 다해 빠른 속도로 공을 던집니다. 물론 야구공 안에는 공기와 함께 허공도 있겠지요.
야구공 안에 있는 허공도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포수 앞까지 간다고 생각하겠지요. 착각인거예요. 허공은 오고감이 없이 늘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육식(六識), 칠식(七識), 팔식(八識)이니 이 얘기하면서 의식의 경계를 나누어서 이 얘기들 합니다. 정말 그렇게 따로따로 구분 지어져서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따로따로 있는 거 아니예요
다 그놈이 그놈인 것이예요. 우리들의 그림자가 우리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같이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할 거예요
역시 착각입니다. 그림자는 우리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찰나찰나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찰나찰나에 생기는 현상을 영화 보듯이 보면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들의 옛 얼굴을 사진을 보면서 생각할 거예요.
그대로 이어져 늙어왔다고 말입니다. 역시 착각입니다. 구태여 오랜 옛날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저께라고 합시다.
어저께의 나의 모습은 오늘 현재 나에게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물론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분들이 더 많이 있겠지만요. 그러나 없다 해도 없는 것이 아니며 있다 해도 있는 것이 아니예요. 이 모두 모두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의 一(한)의 작용으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비록 이 현상들이 분명코 ‘허상’이라 할지언정 허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고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一(한)의 비밀스러운 해법인 것이예요.
제가 이렇게 쓸데없이 헛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다음 구절 즉 생칠팔구(生七八九)의 깊은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충분히 워밍업(준비운동)을 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속>